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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율법과 복음에 대한 고찰

사하라84 2009. 10. 25. 21:13

숭사리 다음카페의  지니님의 댓글만 따로 모았습니다.

 

파란글씨가 지니님 글입니다. ** 표시는 일부러 닉을 감춘것이오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니님

 

**님.. 저는 성령의 법의 '내용'과 율법의 '내용'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율법의 내용과 성령의 법의 내용이 같으면, 성령의 법이라고 칭할 필요도 없으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면 됩니다. 율법에 어긋남이 없으니, 양심의 고소를 받질 않지요. 그러나 성령은 거듭난 양심을 통해 처음에는 이웃을 사랑하였으되 끝까지 사랑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선한 일을 하다가 쉬이 낙심하는 나의 인내없음과 불평하는 마음을 지적하십니다. 이게 어떻게 '내용'이 같습니까? 다르지요..

 

초등학교를 마치면 중학교를 갑니다. 초등학교때 배운 여러가지를 포함하여 더 진보된 것을 배웁니다. 초등학교 때 배운 내용이 기초가 된다고 해서, 중학교나 초등학교나 배우는 내용이 같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학생은 새로 배우는 것들을 열심히 배워야지요, 초등때의 내용을 언제까지 돌아보며 그것을 기준으로 삼겠습니까.. 곧 고등학교도 진학해야 하는데요.. 덧셈 뺄셈이 기본이니, 미적분과 덧셈 뺄셈의 내용이 동일하다고 할 수 없듯이, 율법이 성령의 법과 내용이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어디선가, **님이 '율법이 복음이다'라는 표현을 인용하셨는데.. 그렇다면, 복음, 즉 복된 소식(소식의 영어는 news지요, 새로운 소식입니다..), 또는 신약 즉 새로운 언약으로 부를 필요도 없으며, 성령의 법이라는 표현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나무와 생명과나무를 심으셨는데, 심으신 분이 한 분 하나님이니까, 선악과와 생명과의 내용이 동일하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온 거룩한 율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반영하고 있는 법입니다. 선한 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기능을 무시하거나 성령의 법과 분명히 다른 내용을,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님 댓글

지니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 갔다고 초등학교때 배운 내용을 폐지하거나 그것이 폐지될 수 없는 것이지요 ( 이 토론의 쟁점은 폐지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

 

지니님

예.. 처음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선악과는 여전히 살아있고, 율법 또한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악과나무와 관계없고, 율법과 관계없습니다. 그 나무와 율법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그 나무와 율법은 내게 있어서 죽은 것과 같습니다. 다시 보지 않습니다. 미적분 하다가 문제가 안 풀린다고 덧셈뺄셈부터 들여다 보겠습니까? 아닙니다. 미적분의 공식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미적분의 원리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물론 더하기 빼기조차 안 되는 학생들은 초등학교를 다시 다녀야 하지요.. ^^; 그는 늘 낙제하기 때문에 중학교 진학이 불가능합니다..

 

**님

지니님, 미적분은 덧셈 뺄셈을 근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덧셈 뺼셈이 폐지된 것이 아니지요

 

지니님

 

예.. 그렇지요.. 그렇지만 중학교에서 덧셈 뺄셈 시험을 치며, 하나씩 틀릴 때마다 한 대씩 맞지는 않지요.. 중학교에서는 미적분을 시험칩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난 지체가 율법에서 벗어나 성령의 법아래 들어온 후, 계속 율법에 자신을 비추어 날마다 죽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님의 뜻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율법을 굳게 세운다라는 표현을..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날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 내가 그리스도안에서 죽어야 하는 이유를 날마다 확인하며, 은혜안에 감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율법을 예수님께서 두가지 큰 계명으로 정리하셨으니,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므로, 너무나 선한 것이고, 우리 삶의 나아갈 방향이므로, 율법의 정신이 복음의 정신(혹은 성령의 법의 정신)과 동일하지 않은가..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혹시 **님의 뜻을 잘 못 이해하였으면 지적해 주시와요..)
 
그러나, 문제는, 율법은 세부조항을 가지고 있는 성문화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 중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으로 정죄하는 법입니다. 율법의 특정 부분은 폐해지고, 특정부분은 보완되고, 특정부분은 강화되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의도를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수정 불가! 입니다. 하나님의 법이시며, 그 분은 온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 법은, 그 법아래 들어간 자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일하게 조항을 적용하고 동일하게 정죄하며 동일하게 댓가를 요구합니다. 공의롭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는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수정/보완/일부 폐기/일부 강화를 감히 해서, 때마다 이리 꿰맞추고 저리 꿰맞추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칼에, '죽는 것' 밖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은 자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 사망을 댓가로 치루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율법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루신 것을 믿음으로 연합한 자들이 그 아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었다, 벗어났다, 관계없다.. 라고 표현합니다. 율법과 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벗어난 자들이 주의 부활에 연합하여 함께 일으켜져 들어간 곳은 바로 은혜아래 입니다.. 성령의 법이라 불리우는 곳입니다. 연약함을 체휼치 않으시고, 탄식으로 중보기도하시며, 율법이 말하지 않았던 모든 세밀한 곳까지 말씀하시는 법입니다.. 이 법은 율법과 내용이 다릅니다. 성문화된 율법의 내용이 쫓아올 수 없는 격을 지닌, 십자가의 도 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추며 날마다 죽어야 하는 법은, 율법이 아니라, 바로 바울이 고상하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십자가의 도가 담겨져 있는, 성령의 법인 것입니다.
 
한 법이 있었고, 다른 새 법이 나타났습니다. 두 법 모두 온전히 자기의 기능을 합니다. 한 법은 죄인들을 위한 법이고, 다른 새 법은, 한 법에 의해 믿음으로 죽임을 받고 생명으로 옮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법입니다, 의를 향한 법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법에 의해서만 통치받습니다. 공로는, 잘 아시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한 법에는 십자가가 없고, 다른 새 법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서로 다른 내용이고 서로 다른 정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죽은 법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관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새 법을 날마다 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내용이라고 생각됩니다.
 
율법에는 도덕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일정부분만 떼어내도 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데, 하물며 통으로 일정부분만 떼어내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후, 선에 해당하는 부분만 떼어내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선악과에는 선과 악을 동시에 분별하고 포함합니다.. 우리는 선악과가 아닌, 생명과를 향한 지체들입니다..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 것은 율법에 비추어 죽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법에 비추어 죽습니다. 죽는 내용이 다릅니다. 율법에 비추어 죽으려면, 간음해야 죽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법에 죽는 것은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하지 않았기에 죽고,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아서 죽습니다. 간음 안 했는데도 죽습니다. 내용이 다르지요? 말씀드렸듯이, 율법에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고, 성령의 법에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는 기준이, 죽는 기준이..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았습니다. 의에 대해 살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죄의 기준이, 의의 기준이 율법과는 달라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매일 죽는 이유는,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번,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해 한번 죽은 것으로 율법의 정죄함에서는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시 죽고 또 죽는 것은, 의로 살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가 드러나도록,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연합해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의미가 다릅니다. 죽는 이유가 다릅니다..
 
**님
 
님이 말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율법) 도덕률이 아닙니까?
 
지니님
 
네, 제가 말하는 그것은 율법의 도덕률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살펴보세요.. 남편이 아내를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라, 어디 나와 있는지요.. 613개 조항을 샅샅이 살피셔도 그런 계명은 없습니다. 율법에서 요구하는 남편의 의무를 모두 행하면서도 아내를 <전혀 사랑하지 않을 수>입니다. 율법에서 요구하는 남편의 의무를 다 행하면서 아내를 그리스도가 사랑한 만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대체 <어떤 기준으로> 죽겠습니까..
 
**님
 
산상수훈에 나타납니다
 
지니님
 
산상수훈이 율법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을 너희가 들었으나' 등등의 표현은 <율법은 이렇게 말하지만> 이라는 뜻이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표현은 <새 법은 이렇다> 라는 뜻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율법을 재해석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과 복음에 대한 소개가 함께 있는 말씀이십니다. 율법과 새법의 교차 지점입니다. 복음서의 많은 말씀들은 <율법아래에 계신 예수님께서 새법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과도기입니다.. 산상수훈에는 십자가와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새법에 대해서도 완전히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산상수훈은.. 다르게 다루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전부터 제 이해는 이렇습니다. 복음서는 율법아래 나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까지의 행적이십니다. 율법과 복음의 과도기이며, 율법과 복음의 혼재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으로 거론하실 때에는 율법의 기능(성격)대로 <정죄>를 다루십니다. 즉, 백체를 다 잘라내라, 음심만 품어도 돌맞아 죽어야지, 형제에게 미련하다고만 해도 지옥불행이야~ 라고 <정죄>하십니다. 복음에 해당하는 부분을 다루실 때는 <죄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라고 <은혜와 용서>를 다루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총제적으로 <율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구약시대때 하나님께서 주신 613가지의 조항을 가지고 있는 성문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일하지 않으면, 소통에 혼란이 생기고, 산상수훈을 가져오면 <율법>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통일되지 않아 더욱 소통에 어려움이 생길 것으로 생각됩니다.. (보시다시피, 복음서에는 <정죄>와 <용서>사이에 들어설 십자가도 거의 설명되고 있지 않고, 이방인에게 향하는 복음도 상징적으로 아주 조금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님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율법을 해석하신 것입니다. 뒤엎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시면서도 이 새계명은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니님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안하시고, <새>계명을 주신다시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율법을 재 해석하셨다고만 단언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율법은 이렇게 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노니>라고 하신 겁니다. 율법은 정확히 613가지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라는 이름아래에 율법과 복음을 동일하게 묶으면, 하나님이 심으신 선악나무와 생명나무가 동일해야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마귀와 악한 영들이 있으니, 천사와 동일하다고 해야합니다. 목적과 의도가 다른 것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습니다
 
**님
 
강령이다 (마 22:40)
 
지니님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율법이란, 613가지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산상수훈 문장들은 그 조항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산상수훈은 율법의 기능인 <정죄>를 강조하신 부분과, <새 법>의 격을 소개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 22:40은 <율법>을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여기에서의 새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율법의 가장 큰 두개의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 이웃을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어찌 동일한 내용입니까?
 
**님
 
일단, 지니님은 산상수훈이나 새계명이 율법이라는 것에는 동의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새계명을 마태복음의 새계명과 요한복음의 새계명으로 나누시다니.....점점 토론이 점입가경으로 가네요)
 
지니님
 
율법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사랑할 것을 명하십니다. <새 계명>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십자가> 서로 사랑할 것을 말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후, 끝까지 사랑하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후에, 그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계명의 내용이 얼마나 다르며, 계명이 얼마나 다른 방법으로 주어졌는지, 그리고 그 계명이 얼마나 다른 경로로 이루어지는 지.. 그 <내용>과 방식의 차이점이 정말 없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 댓글을 다 읽으셨는지요.. 저는 계속.. 산상수훈이 율법이 아니라고 말씀드렸고, 새 계명은 더욱 더 율법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은 율법이고 새 계명 (새 법)은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율법을 능가하고 초월하며 (그 크기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율법사가 <율법>에 대해 어느 계명이 젤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 중에 젤 큰 게 이 두개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라고요. 근데, 요한복음의 <새 계명>에서는 <내가 너희를 이렇게까지 사랑한다>가 먼저 나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율법을 요약한 2가지 중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에는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이>에는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과 원수--죄로 인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 계명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웃을 미워하겠습니까? 율법이 바라보는 곳과, 새 계명이 바라보는 곳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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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귀한 글이라 모았습니다. 지니님께 허락을 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출처 : 사랑 그리고 편지
글쓴이 : 사랑그리고편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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