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귀한 말씀

[스크랩] 초대교회와 사울, 그리고 성령의 일하심.

사하라84 2010. 1. 20. 19:17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날부터 신도들을 박해하는 모진 강풍이 일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휩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한 신도들은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난을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몇몇 경건한 사람들이 와서 슬퍼하며 스데반을 장사하였다.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행8:1-3)현대어 성경.

 

스데반이 죽음과 초대교회의 급변하는 상황

 

사도행전을 따라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의 태동과 함께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확인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초대교회를 성령이 세운것임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뿌리가 성령으로부터 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제 구약의 성전 시대를 종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모형과 그림자로 주어진 구약의 실체가 예수 입니다. 성막과 제사법과 동물의 희생제사가 당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언약으로 부터 상호간에 이행되어야할 종교적인 관계였다면 그것은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고 유지 되어야 마땅하지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히10:12-14)새번역. -히8~10장참고-

 

 

구약시대가 "보이는 성전" 시대였다면 이제 신약은 "보이지 않는 성전" 시대입니다.

 

현대 기독교가 마치 보이는 유형 교회와 우주적인 교회라고 신학적으로 한정 지어서 그러한 틀에 반영되지 못하면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이상한 규정으로 자기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참 교회와 참된 성도들을 오히려 핍박하는 괴이한 일들이 있어왔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는 십자가로 걸어가시고 자기 몸을 속죄제물로 하나님앞에 드렸다는것이고, 그 속죄제물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는 것이며, 그 제사가 받아 들여진것이 십자가 의 흘린 피로 말미암은 구속이며, 바로 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말미암아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르자, 곧 때가 이르매 성령이 친히 약속을 믿고 기다린 무리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면서 부활 하시고 승천하신 예수의 약속을 의지하며 모인 무리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시고 그들을 세우신 것이 바로"초대교회"의 탄생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하면, 초대 교회는 건물이나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2:19-22)

 

 

당시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자랑이며 신앙의 본질이었습니다.

 

보이는 성전을 얼마나 가치있게 생각하였는가는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이기도 할것입니다. 크고 높고 웅장한것에 힘과 권위가 있다고 보는 인간적인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대자연의 엄청난 크기와 높음과 넓이에 저절로 경외감을 느끼는것입니다.

 

본능적입니다. 동물들도 자기보다 크고 강한 상대를 보면 압도 당하듯이 인간의 심리는 일단 큰 것에 맥을 못춥니다. 그래서 교회 건물도 갈 수록 높아지거나 대형화 되고 교인들의 숫자도 많아야만 거기에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한 유대인들의 사고를 철저하게 깨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신것인데...진짜 성전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실은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나서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유대인들이 참된 성전이신 예수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해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결코 알수 없습니다. 사울이 언제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가 찾아 왔기에 드디어 눈이 열린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남이 주어진 것입니다. 노력하고 추구하고 연구해서 거듭남이 된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성령이 개입하셔서 새로 눈을 뜨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는 어떤 집단적인 공동체나 건물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듭난 자들" 이며 "거듭난 자들의 모임"며 연합이지 건물이나 조직이나 집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셔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별 다른 스승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스승이 되셔서 자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특별한 지도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은사와 분량으로 성령의 뜻에 의하여 섬기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시기와 경쟁이 없습니다. 기도와 은혜와 나눔만이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거듭난 자들은 예수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지 사람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자랑할 뿐입니다.

 

예수만을 자랑하는 것이고 주어진 은혜를 자랑하는 것이지 가문이나 배경이나 다른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서로 낮아지기를 원하며 서로 섬기는 즐거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처럼 그렇게 낮아지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듭난 교회에 무슨 분쟁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교회에 무슨 건물이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안에 거듭난 자들이 교회입니다.

 

다시한번 봅시다. 스데반의 급작스러운 순교는 초대교회를 진동시켰습니다. 모두들 은혜로 충만하였고 성령이 보호하시므로 늘 기쁨으로 충만하였던 초대교회에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갑자기 늘어난 무리들과 당시 소외 당하던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에 바빠서 문제가 발생함으로 일곱명의 집사를 일군으로 세웠습니다. 그들로 봉사의 일을 전담하게 하면서 사도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일을 하려고 생각한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당시의 현상을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받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던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성령의 역사로 기이한 일들이 나타나자 마치 새로운 주류로서의 기회라고 생각한것입니다. 만일 당시에 어떤 핍박이나 박해가 없었더라면 초대교회 공동체는 급격하게 유대교와 협력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견고한 체계를 모방하여서 새로운 종파를 구성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힘이 생기면 그렇게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켜야하기 때문입니다. 지켜야할 것이 생기면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켜야할 것이 없을 때는 자유로왔던 삶이 무엇인가 보호해야할 것이 생기면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사도들을 부러워 하며 경이롭게 바라보기 사작합니다. 그들은 또한 당시 유대사회에서 배척 당하던 과부들을 돌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나눔을 실천하였기에 모두의 주목의 대상이 된것입니다.

 

한가지 알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회 봉사와 복지에 대하여 몰랐겠습니까?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을 조직적으로 구제하는 일에 대하여 몰랐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것은 마귀역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를 시험할 때 무엇으로 시험합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당시나 지금이나 굶주림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럴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서 예수의 머리와 발을 씻기운 여자를 향하여 어떻게 비난하였는지요?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년 품삯)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요12:3-8)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선한일이 가치있다고 말하면서 예수를 향하여 돌려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조직이 필요하고 또 교회가 부유해야만 이러한 구제를 할 수 있다고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교회를 세우심은 그런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시험에 대한 예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향하여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능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한거번에 굶주림에서 해방 시켜 보라고 충동질" 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얼마나 정당한 명분입니까? 이 명분을 이용하는 목사들은 또 얼마나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단호하게 마귀를 향하여 선포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빵만으로 사는 것은 사람만 아니라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이 죽었는데 겉 사람만 배불르게 먹으면 그것이 진정한 삶입니까? 영혼없는 몸이 죽은것처럼 예수는 이 땅에 죽은 영혼들을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생명주는 영으로 자기를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준 마른 뼈가 살겠습니까?

 

생명없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생명없는 이스라엘를 향하여서 생기를 불어넣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른 뼈같은 죽어있는 영혼들을 향하여서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는 그렇게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며 생명의 떡이 되시려고 십자가로 향하신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기에 구제사역에 급급하여서 성령의 뜻을 살피지 못한것입니다.

성령은 스데반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순교하고 싶다고 순교하는 게 아닙니다. 죽고 싶다고 죽는것이 아닙니다. 지옥 가고 싶다고 지옥 가는게 아닙니다. 예수의 명령이 있어야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지옥도 가고 천국도 갈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무슨 공로를 행한다고 기도를 쎄게 한다고 다 되는것이 아닙니다.

 

거라사에 군대귀신들이 예수 앞에 엎드려서 어떻게 하소연합니까?

 

예수께서 뭍에 내리시니, 그 마을 출신으로서 귀신 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않은 채,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보고, 소리를 지르고서, 그 앞에 엎드려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더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이미 악한 귀신더러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귀신이 여러 번 그 사람을 붙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서 감시하였으나, 그는 그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대답하였다. "군대입니다." 많은 귀신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 놓아 기르는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은 자기들을 그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 돼지 떼는 비탈을 내리달아서 호수에 빠져서 죽었다.(눅8:27-33)

 

 

인간 본성은 언제나 세력을 형성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항상 경계해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조직하고 틀을 만드는것입니다. 규칙을 정하고 힘을 과시하려 합니다. 개혁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와 조직을 설계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기존 기독교를 향하여 빠져 나오라고 하자 공감하면서도 그러면 대안을 요구합니다.

 

무조건 탈출만 하면 그만인가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이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을 요구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대안은 없다" 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빠져 나오면 그 이후부터는 성령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자들과 함께 하시는 성령은 그냥 강건너 불구경만 하시지 않습니다.

 

낮에 해와 밤에 달이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옷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성령이 스승되시고 깨닫게 하시고 할 말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이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로 매일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교회들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을 신뢰함이 대안입니다. 사람이 이끌어가는게 아닙니다.

 

초대교회를 이끌어가시는 성령의 역사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사도들이 이끌어 가는게 아닙니다. 성령이 행하십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사울의 불같은 핍박이 어찌 사람에 의하여 일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시발점으로 초대 교회가 엄청난 핍박에 직면합니다. 여기서 교회가 과연 무엇인가 다시 조명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날부터 신도들을 박해하는 모진 강풍이 일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휩쓸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도들을 제외한 신도들은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난을 떠나야 하였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몇몇 경건한 사람들이 와서 슬퍼하며 스데반을 장사하였다.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를 이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건물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도들은 아직 예루살렘에서 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을 제외한 신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피난을 간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행1:8)

 

"사울은 야수처럼 날뛰면서 교회를 휩쓸고 다녔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신도들을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

 

집집마다 찾아 다닌것은 곧 교회가 가정 집이었다는 것이며 다름아닌 "거듭난 사람들" 이 교회라는 분명한 증거들입니다. 보이는 조직과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당연히 예수 십자가의 피로 인하여 그 피를 믿음으로 죄 씻음을 받은 믿는 자들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어찌할고 하며 탄식하며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며 그동안 가던 길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오직 예수의 말씀만이 최고의 가치이며 생명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헛된 형식주의나 외식을 거절합니다. 율법주의를 거절하며 생명의 성령의 인도함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계명이나 전통이나 관습에 메이지 않습니다. 셍명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사랑하며 모든것을 복음을 위하여 무가치한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푯대이신 예수만을 바라보며 가는 삶입니다.

진정으로 주의 핏 값으로 산 교회로서의 가치를 발견하고 스스로가 성령을 모신 성전임을 알아서 거룩으로 가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모두가 추구하는 넓은 길을 거절하고 좁고 협착한 길로 가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오직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의 충만한 기쁨" 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14:26-27)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까?

 

다음에는 교회들이 어떻게 성령의 이끌리심에 따라서 길을 가는가 살펴보려합니다. 진정한 교회들인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매우 중요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2010/01/20.ⓒ 사랑그리고편지.

 

 



출처 : 편지 한 보따리
글쓴이 : 사랑그리고편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