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20)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복음서를 계속 묵상하면서 놀라는 것은 예수님은 단 한번도 보통 사람들이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를 누려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그닥 좋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유대라는 작은 나라는 여호와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유일신으로 섬기는 독특한 나라였습니다. 주변 나라들과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성향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렇다고 강대국가도 아니었기에 역사적으로 수난을 많이 당한 한 많은 민족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이라면 초 강대국인 로마제국의 속국으로서 민족의 주권을 빼앗긴채 로마의 한 지방자치정권과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겨우 행사할 권리가 있다면 유대의 종교적인 행위는 인정을 받았다는 것뿐이지 실상은 포로신새와 같은 처지입니다.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부당한 억압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을까는 일일히 다루지 않더라도 짐작하고도 남겠지요. 나라의 소중한 주권을 잃어버린체 하루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은 어느날 로마 황제의 특별한 명령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귀향해서 호적등록을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구조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효율적으로 로마 정부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한번에 구별할 수 있는 장치로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곳곳에 흩어져서 유대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들을 무력화 할 수있고 감시할 수 있도록 샘플 조사를 하려는 의도가 있겠지요.
만일 여기에서 호적 등록을 하지 않게되면 자연스럽게 모든 공식적인 활동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법 외국인 체류자들과 같이 기본적인 사회적 활동을 하는데 큰 걸림이 되는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요셉도 베들레헴 고향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예수께서는 이러한 혼란한 중에 태어나셨고 그것도 변변하게 누울 자리가 없어서 말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헤롯왕의 비열한 살인명령으로 당시 갓 태어난지 두살 아래의 어린 유아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엄청난 끔찍한 공포의 시기에 나셨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아기 예수님을 숨기우다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머나먼 애굽나라에 망명 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 시작
부터가 고난의 출발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물론 이렇게 극심한 어려움속에 태어나는 생명들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각지대안에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속에 태어나는 생명들이 분명 있습니다만 보편적으로 볼 때는 거의가 안정적이다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유년시절을 보내시기 위하여 유대로 돌아 왔던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을 중심으로 성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원수들이 모두 죽고 나서 돌아 왔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다지 가정 형편이 좋을리가 없었던 예수께서는 일찍 아버지를 보내고서 어머니를 도와서 가장노릇을 해야만 하셨습니다. 목수일을 하시면서 가족을 돌봐야 했었기에 아마도 편히 쉴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야만 했습니다.
거기서 40일을 주리시고 갈하셨습니다. 육체의 모든 기력이 다 빠졌을 때 사단의 시험과 유혹과 정면으로 싸우셔야만 했습니다.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 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 안에 감추이신 독생하신 주님께서 말씀이신 우리 주님께서 죄인으로 옷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도 땅에 내려 오심만도 형벌일진데 거기다가 주리고 목마르시기까지 하시며 감히 더러운 사단 따위에게까지 시험을 받으셔야만 했습니다.
누가 감히 메시아를 시험할 수 있습니까?
감히 사단따위가 지극히 높으신 우리 주님앞에 어떻게 설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종으로 오셔서 기꺼이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위하여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체질을 경험하시고 아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이제 최후의 시험인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자기를 따라 오겠다는 감동어린 고백을 하며 엎드린 어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7,58)
가는 곳마다 병자들로 가득 하셨고 들어가는 마을마다 귀신들이 앞을 막았습니다. 자기를 믿고 영접해야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절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한시도 맘 편할 수가 없는 삶이었습니다.
결국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고난과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어찌 순탄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결코 평안을 빼앗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환경적인 조건들은 비록 거칠고 투박하고 쉼이 없는 고단한 삶이었지만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의 신비한 관계, 친밀한 사귐으로 인하여서 언제나 평안하셨습니다. 아무리 위험을 당하고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옷이 발가 벗겨짐을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평강은 영원한 생명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말입니다. 육체의 고난이 없다고 평안할까요? 보이는 현재적인 부한 삶이 과연 성경적인 평안일까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리 살지 못하셨을까요? 또한 제자들은 왜 그렇게 평안한 삶을 살지 못했을까요?
어떤 분들은 자꾸만 육신적인 안락함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현세적이며 실제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온 복음을 말합니다. 전인적인 복음을 주장합니다. 성도들이 마땅히 여기서도 부유함을 믿음으로 받아야 온전한 구원이며 복음이라고 강변을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이 일단은 부자로 성공해야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어때요?
솔깃하지 않으세요? 예수 믿고 구원도 보장 받고 덤으로 건강도 하고 물질적으로도 성공해서
하나님 일을 효과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라고 힘주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업도 사업도 성공해서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일등을 해서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난이나 인내는 그닥 신경쓰지 말자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를 누려야 진정한 믿음이며 복을 받은 것이지 어떻게 가난하고 병들면서 맨날 울며 불며 찔찔짜며 주여 주여 하는것이 복 받은신자냐는 것입니다.
병이 들면 예수 이름으로 선포해서 병 고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것을 꼬박 꼬박 바쳐서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목숨걸고 해서 축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되시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좋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누가 병들고 싶고 가난하고 싶겠습니까?
만일 이것이 온복음이라면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성도들은 전부 믿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엉터리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병도 못고치고 부자도 못되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형편없는 가난뱅이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먹게 하고 있다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그럼 예수님은 왜 그렇게 고난의 삶을 살았을까요? 바울과 사도들은 왜 그렇게 곤고함 속에서 비참하게 살았을까요? 이들은 전부 믿음이 반쪽이거나 어디가 잘못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의 삶이 그걸 증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온복음을 누려야 한다는 주장대로라면 실패한 인생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역시 아무런 효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병도 못 고치고 부자도 안되었으니 십자가가 실패했거나 사도들의 믿음이 한참 모자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힘들게 살아가는 성도들은 모두 믿음이 모자란 엉터리 신자라는 결론입니다.
그에 반하여 십일조 철저히 해서 사업도 성공하고 장관도 되고 국회의원 뱃찌도 달고 떵떵거리며 잘나가는 신자들은 엄청난 믿음의 온 복음을 누리는 훌륭한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의 모양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인 제사와 의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호세아를 통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무슨 말씀인지요? 사람들이 너희를 환대하고 반기며 영접할 것이다 하시는 가요? 내가 핍박 당하는 것처럼 너희들도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말은 나와 같은 길을 가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이 세상은 다르기 때문에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방향이 다르니까요. 모두가 저길을 갈때 우리는 이길을 가야 하니까요. 모두가 옳다고 할 때 우리는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이단 사이비도들을 비교해서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 이단 사이비들은 구별이 잘 안되거든요. 예전처럼 막가파식으로 하는곳 거의 없습니다. 세상에서 오히려 환영을 받지 않습니까?
세계의 대형 행사때마다 이단교파나 사이비 종단들이 참여하지 않는 행사가 없고 주관하거나 협력하지 않는 행사가 없지 않습니까? 물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기독교를 두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바르고 참되게 성경을 묵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라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구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라면 기존 제도권 교회와 여러가지로 상충되는 신앙관 믿음관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득권에서 본다면 당연히 걸림이 되는 것이며 핍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핍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면 그들의 뜻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입 다물고 그저 아멘 하면서 은혜나 나누면 핍박을 피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짜피 제도권에 속해 있지 않아서 그나마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현제 제도권에 속해있는 사역자들이 저처럼 말한다면 거기서 살아날 수 있을까요? 미국의 유명하신 어느 목사님은 세미나에서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를 철저하게 돕는길이 무엇인가를 자상하게 교육시키고 있더군요. 담임목사의 꿈이 하나님의 꿈이라고 어쩌고 한것같은데 말입니다. 워낙 꿈꾸는 요셉이야기로 유명해져서 뭐든지 꿈꾸는대로 된답니다.
이런 현실속에서 어떤것이 진정한 신앙이며 믿음이며 복음일까요?
예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주시지 핍박을 받을 것이니 각오 단단히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나 핍박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평안으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핍박이 와도 환난이 와도 넉넉하게 이길 수 있는 주님의 평안이 주님을 따르는 모든자에게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지금도 동일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만을 소망하며 바라보며 인내하며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자들에게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마5:3~12) 아멘.
2008.09.08.ⓒ 사랑그리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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