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말씀 긴 여운~~~

내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사하라84 2012. 10. 10. 19:58

내 사랑하는 아들, 딸에게

나는 이 세상을 떠 난지 8년 6개월이 되었고, 제 아내는 4년 6개월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 멀리 다른 곳에서 아내와 같이 제 아들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서, 지난날 나의 가족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자식들에게 세상사는 동안 잘 살도록 충고도 하고 싶고요.

저를 소개한다면 1936년생으로 해방 직전에 부모님을 여위고, 위로 두 분의 형님과 누님이 계셨습니다. 큰 형님은 6.25전쟁 전에 군에서 휴가 나왔다가 복귀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작은 형님은 6.25 전쟁 중에 어디론가 행방 불명이 되었지요. 그리고 저보다 10살 위의 누님과 이웃하며 살았습니다.

일찍 부모님을 여윈탓도 있었고 가진 재산도 없어 남의 집 종살이를 하면서 청년의 시절을 보내다 20대 초반에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는 전라도 지방에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처녀 때는 힘든 일을 해보지 않았으며, 아내의 막내 이모가 “서울에 좋은 집에 시집 보내주겠다”고 하여 따라왔다가(실은 막내이모 집안의 총각을 소개해 줄려고 데리고 옴) 내가 사는 곳에서 20여리 떨어진 산골로 데리고 가 총각을 소개하니 아내는 “이런 곳에서 살수 없다”고 내가 사는 곳까지 왔다가 동리 사람이 “혼자 사는 총각이 있는데, 가진 재산은 없지만 열심히 살려고 한다”고 나를 소개하니 아내는 나를 불쌍히 여기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식도 못 올리고 읍내에 나가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결혼을 대신하였으며, 아내와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처녀때 호미나 낫을 만져보지 않았던 아내는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저와 함께 감당해 나갔습니다. 아내와 함께 한지 1년쯤 지나 큰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큰 아들입니다.

1950년대 말에 태어난 나의 사랑의 열매 큰 아들인데, 그때는 너무나 힘들고 바쁘게 살아서 아이들을 제대로 돌 볼수가 없었지요. 얼마나 식성이 좋은지 무엇이든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이었지요. 양잿물을 집어 먹기도 하고, 밥상위에 올라가 모든 음식을 헤집어 놓기도 하고,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터질 지경으로 있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태어나다 보니 정말 집이 정신이 없더군요.

가진 농토가 없어 주로 남의 밭이나 논에 나가 품을 팔아오는 일을 하였으며,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때는 양잠을 하여 좋은 집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렇게 큰 아들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가정 형편상 어쩔수 없이 타지로 내 보내야 했습니다. 배움이 짧은 탓인지 큰 아들은 직장은 다녔지만, 자기 생활하는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가끔 동생들 학비라도 도우려고 얼마의 돈을 보내와 그것이 생활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요.

어찌보면 참 고마운 아들이었지요. 19세 되었을 때 비보가 날라왔습니다. 아들이 사출기계에 손이 들어가 왼손이 엄지만 남고 다 절단되었다고 하더군요.

나와 아내는 비참한 심정이었습니다. 좋은 부모 만났다면 어린나이에 고생하지 않을 것이며, 건강한 몸으로 살았을 것을.... 마음만 안타까울뿐 아들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큰 아들이 28세에 결혼을 하였지요. 아들, 딸을 낳았기에 행복하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참 아쉬웠습니다. 특별한 기술이 없이 가장이 되다보니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성남, 용인, 수원, 서울로 이사다니며 참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나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요. 내가 세상을 떠난 며칠 후에 아들들은 내가 조금 남겨둔 재산을 제 아내를 중심으로 지혜롭게 나누어 상속을 받았지요. 내가 큰 아들에게 너무 아쉬워하는 것은 비록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내 땅을 상속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20년 함께 한 며느리와 이혼하였지요. 그후 재산을 다 팔아 탕진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보자니 어떻게 할수도 없고 마음만 무척 쓰리고 아팠습니다. “야! 이 아들아 앞으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느냐? 그 얼마나 된다고 다 팔아가지고 탕진을 하면, 너의 미래와 네 아들, 딸은 어떻게 되겠느냐” 50대 중반의 큰 아들을 바라보자면 지금도 마음이 쓰리고 아프답니다.

 

다음으로는 내가 희망을 많이 걸었던 둘째 아들입니다.

우리 둘째 아들은 다른 형제들 보다는 조금 남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태어났는데, 똘망 똘망 한 것이 제 위의 형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지요. 그래도 가난하였기에 큰 아들 타지 나가고, 두 살 적은 둘째는 어떻게든 가르쳐야 겠다는 생각에 중학교에 보냈습니다. 3년의 시간이 지난 뒤 아들은 졸업을 하고 가정을 돕겠다며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비록 중학교 졸업이지만, 대학교 졸업한 것으로 생각해라”는 말에 아들은 집안 형편을 잘 알았기에 “예, 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가난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아들을 보면 언제나 든든한 친구와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둘째 아들은 중학교 졸업 후에 집에서 가까운 회사에 다녔는데, ‘특별한 기술을 배울수 없다’ 하여 서울에 있는 조금만 철공소에 들어갔지요.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며, 얼마의 월급을 받았는데, 아착 같은 아내는 아들이 다른 곳에 돈을 쓸까봐 1년에 얼마짜리 적금을 들었습니다. 17살의 둘째는 속히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날 전화가 왔기에 받아보니 “아버지 저 강원도 탄광에 취직을 해야겠습니다”라고 하기에 “아들아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곳은 안된다”고 말렸지요. 왜냐면, 70년대 중반과 후반에 탄광사고가 많이 일어나 생명을 잃는 수가 많았기 때문에 말렸습니다. 얼마 후 아들은 또 다시 말하기를 사우디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제 친척과 이웃 최씨도 사우디에 가서 많은 돈을 벌던 시대였기에 좋은 대로 하라고 했더니, 병역관계로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던 아들이 23세에 병역을 필하고 외국에 가겠다고 시험을 본 것입니다. 며칠후 “아버지 저 합격했어요. 이제 우리도 가난에서 벗어날 길이 생겼어요”라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흐믓했답니다. 합격 후 한 달이 지나 아들은 북아프리카 리비아라는 나라라고 하는데, 시골에서만 살아온 나는 그곳이 어딘지 전혀 알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아들이 출국하던 날 김포국제 공항에서 나는 속으로 울었지요. “아들아, 미안하다. 네가 부모를 잘 만났다면 이렇게 알지 못하는 나라로 가지 않아도 될 것을....” 미안한 마음에 아들을 제대로 쳐다 볼수가 없었지요. 그래도 아들은 씩씩하게 나를 위로 해 주었답니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저 꼭 성공해서 돌아 올께요” 손을 흔들며 아들은 내 눈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아들에게서 첫 편지가 왔습니다. ‘이역만리 타국 땅이지만 여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지낼만 하다’고 해서 마음으로 안심이 되었지요.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편지라는 것을 썼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근처도 못 가보았기에 글을 알지 못했지만,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어깨 너머로 글을 읽혀 동리 반장도 몇 년 보았던 경험도 있었지요. 그렇게 어깨 너머로 배운 글을 이용해 타국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지요. 아들이 잘 이해하고 읽으리라 믿고 받침도 제대로 모른 상태로 보냈더니, 아들의 답장이 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1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는데, “꼭 성공해서 이번 기회에 가난에서 벗어나야 해!” 강인한 정신력으로 40도가 넘는 사하라 사막에서 굳건히 견뎌냈습니다. 아들은 계약기간보다 휠씬 긴 2년 3개월을 잘 견디다가 돌아온다기에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는데, 초라한 몰골 때문에 내 속은 또 타들어갔습니다. 65Kg으로 나갔던 아들이 57Kg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래도 건강하게 돌아온 모습에 안도하며, 미래를 향해 더 정진할 수 있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아들은 귀국하여 두 달간 나의 일손을 돕겠다며 바쁜 농사일을 거들고, 곧 바로 회사에 취직을 하였지요. 아들이 나를 닳아서인지 공부에 대한 열의를 갖고 있었지요. 회사에 다니면서도 예전에 외국 나가기 위해 휴학했던 방송통신고등학교에 복학하여 한 달에 두 번은 학교에 가고, 한 달에 두 번은 회사에서 정신없이 일을 하는 아들을 보노라니 또 가슴이 메어집니다. 그래도 젊음이 있어서 괜찮다고 하더니 어느날 내 심장이 멈추는 듯한 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나의 희망이었던 아들 회사에서 폭발 사고가 났다하여 아내와 급히 찾아가니 여러 사람이 죽고 아들은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생사를 알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가슴을 추스르며, 아내의 충격을 완화시키며 병원에 갔더니 아들은 다리 하나를 잃고 중환자실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아들아 괜찮니?”라는 내 말에 아들은 힘은 없어 보였지만,“아버지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저는 살아있잖아요”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서울의 큰 종합병원으로 옮겨 대 수술을 일곱 번이나 받은 나의 희망이었던 작은아들...9개월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의족이라는 것을 부착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의 눈에 띌까봐 나의 마음을 달래며 살아가는 동안 아들도 사회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던중에 주위분의 소개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아들이 중증 장애인이 되어 결혼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병원에서 퇴원한지 서너달 만에 마음착한 며느리를 볼 줄이야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할 정도로 나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습니다. 며느리 덕분에 아들은 기독교인이 되어 어느날 신학 공부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몸도 힘든데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이 힘들텐데...’라며 생각하였지만, 아들은 신학 공부를 마치고 장애인 돌보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덤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며 이웃의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에 아들은 다른 사역지로 간다며 내 곁을 떠나 충청도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물질적으로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떠나 보냈습니다. 처음엔 잘 지내더니 한 8개월 지났을 때, 병원장이 병원 운영이 어렵다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어 병원을 문을 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3개월의 급여를 받지 못한 채로...

나는 힘들어할 아들에게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다. 나도 50년이상 농사일을 하다보니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지만, 고향을 떠나 힘들게 지낼 아들을 생각하니 안타까웠던 것이다. 아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며느리와 함께 다녀가곤 했다. 아들이 돌아갈 때 나는 며느리의 손에 봉투를 하나 쥐어 보냈다. 다른 아들들이 조금씩 모아준 용돈을 많지는 않지만 나의 마음을 전해준 것이다. 충청도에서 힘들게 보내던 아들이 평택으로 이사를 하였지만,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만나보지도 못하고 나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내가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을 때 아들은 참 많이 슬퍼했다. 아버지 이지만 힘든 시기를 함께한 친구를 잃은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 저희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는데, 이렇게 쓰러지시다니요” 병원에 온 나는 자식들이 보는 가운데 1주일 후에 다시 만날 수 없는 먼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두달 후에 자식들은 아내와 함께 내가 남겨둔 조그만 재산을 나누웠는데, 둘째 아들은 참 지혜롭게 하는 모습을 보니 나는 참 흐뭇하고 기뻤다. “아버님께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 형제들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막내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셔야 하니 아버지 집을 상속 받을 것이며, 셋째는 어머니와 저쪽 밭을 갖고, 맏이는 어느쪽에 있는 논을, 나는 다 싫어 할 골짜기의 논을 갖겠소. 내 의견이 어떠시오”하니 모든 형제들이 기뻐하며 다 받아 들였다. 이후 둘째 아들은 비록 홀로된 내 아내와 살지는 않았지만, 4년 동안 아내의 발이 되어 병원도 함께 다니고, 바람을 쐬 드리곤 했다. 아들은 가정을 잘 다스렸으며, 세 아이들을 대학 졸업시키고, 아직 다니는 학생도 있으면서, 본인 자신도 공부에 대한 향학열을 불태워 48세의 나이에 사회 복지학을 전공하고,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사회에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고 한다. 또한 며느리를 더 공부시켜 지금은 병원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내 둘째 아들 마음껏 자랑하고 싶다.

 

나에게 재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셋째 아들입니다.

셋째 아들도 중학교 졸업 후에 직장에 다니게 되었지요. 큰아들과 둘째처럼 무슨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말로 지혜로운 일을 좋아했지요. 그래도 탈 없이 30살 가까이 살았는데, 성남에서 버스 운전을 하다가 술에 취한 사람이 버스에 뛰어들어 사망 사고를 일어나 생각지 못한 구치소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나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지요. 속 썩이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살아왔는데, 결혼 10년만에 성격차이로 이혼한다고 할때 또 마음이 무너짐을 맛보았지요. 결혼 10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은 탓이었는지, 쉽게 헤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고종 사촌누이들이 중신으로 재혼하여 지금은 12살짜리 딸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큰 아들, 둘째 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며느리 모르게 용돈을 많이 주었는데, 요즘에 허리가 아파서 꼼짝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미워질 때가 있습니다.

 

넷째는 제 큰 딸입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작은 봉제 공장에 다니면서 큰 문제 없이 성장하다가 24세에 시집을 가서 지금은 무탈하게 잘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위 녀석의 무뚝뚝함에 서운함도 있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하늘에 있고 저들은 땅에 있으니 야단칠 수도 없고 말입니다. 어떤 때는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내 사랑하는 딸에게 서운하게 할때 혼을 내 주면 시원할 텐데 말입니다. 사위와의 사이에 두 딸을 나아 큰 딸은 서울의 국립대학에서 공부한다고 합니다. 여러 대학에 합격을 하였지만, 엄마, 아빠를 생각해서 학비가 저렴한 곳으로 간다고 했다니, 내 외손녀가 효녀가 틀림없습니다. 하하하.

 

다섯째는 둘째 딸입니다.

제 둘째 딸은 항상 제 옆에서 같이 지낸 시간이 많았습니다. 70년대 시골 부잣집에서나 볼수 있었던 TV, 우리는 70년대 후반에 조금만 TV를 구입했지요. 물론 세 아들은 집을 떠나고 딸들이 학교 다닐때 작은 딸이 학교에서 돌아와 TV를 보겠다고 전원을 꽂았는데, 볼롬이 너무 높아 그 소리에 놀라 뒤로 넘어지면서, 간질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이후 딸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쓰러지며 거품을 물고 많은 사람들의 근심이 되었지요. 아내는 무엇을 먹으면 난다더라 하여 작은 아들에게 대구에 가서 뜸부기를 사오라고 하기도 하고, 이곳 저곳 좋은 약이 있다면 다 찾아 다녔으며, 병이 난다고 하면 무엇이든 먹였던 것입니다. 물론 체질 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딸은 몸이 엄청나게 불어나 밖에 내보내기가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요. 아내는 집에 손님이 온다거나, 오라비들 혼사 문제로 사람들이 오가면, 집 뒷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기도 했으며, 집안 대소사에 일절 참여하지 못하게 하여 내 마음이 찢어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직장에 다니느라 바쁘면 둘째 딸이 아내를 대신하여 내 밥을 챙겨주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였지요. 둘째 아들이 9개월 병원에 있는 동안 아내가 자리를 비워 그 자리를 딸이 잘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던 딸이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내 마음은 10년 이상 앓았던 간질병을 고쳐서 예쁘게 살았으면 했는데, 졸지에 딸을 잃게 되니 또 허망한 마음뿐이며, 세상을 살아서 뭐하나? 나는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하며 신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작은 딸은 23세의 나이에 나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이며, 막내 아들입니다.

위의 형들의 덕분으로 아주 지독한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막내입니다. 그래도 고등교육을 시켜기에 좋은 직장을 가질까 했더니 그것은 저의 기대였나 봅니다. 심성이 착하기 때문인지 어느 직장에 들어가도 성실하게 일을 잘 하였습니다. 그런 막내 아들이 30이 넘어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며느리가 굳이 우리와 같이 살겠다고 결혼하여 신혼 살림을 우리와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한쪽으로는 좋은점도 있지만, 어찌보면 내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없으면 아무 때나 주방에 들어가 먹고 싶은대로 챙겨 먹으면 되었는데, 며느리가 있으니 아무래도 눈치가 보입니다. 며느리가 쓰는 주방을 마음대로 들락 거릴수도 없고, 아무 때나 먹고 싶어도 먹을 수도 없고, 밖에 나갔다가 때가 되면 점심이나 저녁 먹으로 들어와야 하고, 배부른 소리 같지만 며느리와 같이 사는 것이 나에게는 심한 표현으로 감옥살이 같았습니다. 물론 따듯한 밥을 시간에 맞추어 주니 고마운 것도 있지만, 찬밥을 먹더라도 내 자유를 마음껏 누렸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막내 아들도 딸과 아들을 두었는데, 요사이 딸이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요즘에는 옛날 같지 않아 돈을 벌기 위해 항생제, 농약등을 마구 사용하다 보니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먹다보면 병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을 때는 논에서 일을 하다 갈증이 나면 논속에 있는 맑은 물을 마시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무물이 나 먹었다가는 중금속 오염되었다고 난리가 아닙니다. 그러니 막내 며느리야 음식을 가려서 먹고 힘들더라도 인스턴트보다는 너의 정성을 들여 아이들이 건강한 음식을 먹도록 도와주면 좋겠구나. 내가 세상에 있을 때 네 덕을 많이 보았지 이 모든 일에 감사한단다.

 

 

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아내와 여섯 자녀와 며느리 들로 인해 행복한 삶과 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찍 고아가 되어 주어진 삶을 살아왔는데, 내가 원치 않았던 일들로 인해 가슴이 찢어진 날들이 너무 많았지요.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불편한 몸을 가진 자식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니 참 슬퍼집니다. 나는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 자식들이 건강하고, 이 사회에 꼭 필요한 한 지체가 되도록 응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큰아들 모든 것을 잃고 건강도 잃은 상태에서 남은 여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밑에 동생들이 맏이를 불쌍히 여기고 노년에 함께 아픔을 나누었으면 하는 나의 작은 바램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가족밖에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너희들도 멀 잖아 이곳으로 올것이니, 그때까지 힘을 합쳐 멋진 인생을 살기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다. 힘내거라 나의 아들 딸들아!!!”

하늘나라에서 너희들과 인연이 되었던 아버지,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