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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설교비평]십일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소강석 목사

사하라84 2010. 2. 12. 02:18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소강석목사 주일설교(십일조) - 2010.1.24

십일조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창 2:16-17, 말 3:6-12)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만들어 놓으신 이유는 그 선악과나무를 통하여 인간을 제한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제한 속에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잘 섬길때

에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악과는 존재하지 않지만 선악과

나무에 대한 교훈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여러 가지 제한과 계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시간은 칠분의

일로 제한을 시켰고 물질은 십분의 일로 제한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주일 선

과를 따 먹는 것이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십일조 선악과를 따 먹는 것입

니다.

 

  그래서 내가 번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십분의 일만큼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십

조는 우리 신앙의 기본이면서 축복받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십일조는 구원과는 상관이 없

니다. 구원은 예수 믿는 것 하나로 족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의무입니다. 동

시에 축복을 받기 위한 특권이요 비결입니다. (중략)

 

십일조에 대하여 아주 탁월하게 설교한 설교문을 발견했다. 필자는 너무나 흥분이 되었다. 그동안 짐작한것 이상으로 아주 훌륭한 십일조 설교를 본것이 너무 기쁘다. 과연 부흥을 이룬 목사답게 (예전에 방송설교를 아주 재미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말발이 아주 타고났다. 마치 광대처럼 자유 자재로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배우로도 충분히 유명해질 탁월한 끼가 절절하게 보였다.

 

지금도 연일 부흥회 일정이 빡빡하게 잡혔으리라 예상한다. 아마도 모든 목사들이 모셔오기를 학수 고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십일조에 대하여 이렇게 설교하여주는 부흥사를 원하기 때문이다. 직접 할 수 없는 것을 아주 속 시원하게 대신 대행해 주니 얼마나 이뻐 보이겠는가. 부흥강사로 유명해지고 성공하고 싶은가? 다른것 다 치우고 오직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대하여 잘 준비해 보라. 여전히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초청 0순위 부흥강사들의 공통점이 바로 십일조 설교를 얼마나 유창하게 잘 해서 교인들을 세뇌시키는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필자의 눈에 뜨인 소강석 목사의 십일조 설교는 거의 대부분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들의 설교의 전형적인 모델로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똑같은 가치와 똑같은 목회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필자는 참으로 궁금한것이 있다.

저들은 왜 그렇게 하나님과 십일조를 악착같이 연관을 지으려고 하는것일까?

하나님이 과연 지금도 십일조를 내나 안내나를 살피시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 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것일까?

또한 십일조에 목매는  자들에게도 예수는 과연 어떤 존재이며 의미가 있는가 참으로 궁금하다.

하나님의 관심이 "십일조" 인가? 아니면 "아들 예수의 십자가" 로 구속당한 "하나님의 자녀들" 인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기까지 사랑하시고 자녀 삼아준 백성들을 대하실 때 무엇을 가장 관심있게 보실까? 당신의 자녀들이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치는가에 관심이 있으실까? 도대체 한국 교회와 신학은 언제쯤이면 "십일조 타령" 에서 벗어날 것인가? 이미 백년도 훨씬 전에 십일조에 대하여 성경적이지 않기에 더 이상 강요하거나 가르치지않는 서구 유럽의 신학과 교회들과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유독 한국교회와 한인교회의 목사와 신학자들만 "십일조" 에 대하여 한목소리를 낸다.

개혁주의권에서 교리적으로 갈라졌던 "천주교"에서도 십일조를 개신교단처럼 악착같이

강조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들은 왜 말라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할까?

말라기서는 구약의 끄트머리 아닌가? 그러니까 신약의 약속하신 예수가 오시기 까지의 구 언약을 상징한다.

말라기 이후에 마지막 율법과 선지자가 누구인가? "세례 요한" 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한다고 예수는 말한다.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오래된 계약서"를 들이 밀면서 새로운 계약서를 자꾸만 부인하는 것은 무슨 어거지인가? 신학을 어떻게 하였길래 아직도 아브라함이 십일조 했느니 야곱이 했느니 말라기서를 인용하면서

'십자가로 다 이룩하신 주 예수" 의 영 단번 드린 속죄제와 희생제를 자꾸만 정면으로 부인하려는 것일가?

 

구약의 모든 제사법과 규례들은 오실 자의 그림자로 한정적으로 맡겨진 것이다.

바울이 왜 그렇게 율법주의자들과 변론하였을까?

신약 서신서 어디를 보아도 십일조는 커녕 오히려 자비량하고 스스로 일해서 구제하라고 한다.

 

상식적으로 한번만 생각해 보라.

구약의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하는 신분이었다. 직접 제사장이 양이나 소를 잡아서 각을 뜨고

피는 따로 담아서 거룩하게 할 제단 뿔에 바르고 제사장을 세울 때 귓 부리에 바르는등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었다. 번제를 드려야할 때 짐승의 오장 육부를 분리하고 뼈를 추리고 하는 작업을 해야하는 직분이었다.

정망 온 몸과 마음을 드려서 제사장으로서 직분을 수행하려면 보통 힘이 드는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닭 한마리 잡는것도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개를 잡는것도 어디 쉬운가?

정말 힘을 다해야 하는 작업이며 늘 비릿한 피를 보아야 하고 피 맛을 봐야하는 직분이니 그런 고충 또한 일반인들의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그러니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며 막중한 책임감이 있어야 하겠는가?

 

아무나 제사장 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구별된 자들이었다.

당연히 제사장들에게 다른 산업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열한지파- 레위지파는 제사장을 도와주는 직분이기에))이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을 위하여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밭의 소산물등)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성전시대까지였다.

그만큼 구약에서는 "제사"는 하나님앞에 가장 중요한 것이엇다.

짐승의 피를 흘려서그 피로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에 제사장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모든 제사를 종결시켰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제사장들이 필요 없으며

짐승의 피가 필요 없으며 성전도 필요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제사장이시며 진정한 참 성전이시며 완벽하고 흠 없이 드려진 속죄제로서 다 끝마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든지 "예수" 그 이름을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구약시대는 제사장이 대신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성도라면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과 날과 달과 절기를 초월해서 은혜의 보좌 앞으로 직접 나아가서 아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는 아주 중요한 예배에 대하여 이르셨다.

 

 

 여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리는 예언자이십니다.

그러니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왜 유대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유일한 예배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여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온다. 예배는 어디서 드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드리느냐가 중요하다. 너희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유대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예배를 드린다. 이는 구원이 유대 사람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요한복음4장19~24)현대어.

 

십일조와 선악과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말라기의 십일조와 창세기의 선악과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십일조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누구것인가?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도둑했다고 하는 것은 제사장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하나님앞에 구별해서 드려야할 제사에서 흠있는 것으로 좋은 짐승을 바꿔치기한 것을 폭로하고 있다. 너의 총독에세 그런 하찮은 것을 주면 받겠느냐 한것이다. 저는 것과 상한 것을 하나님이 어찌 알랴 하면서 제사장들이 좋은것들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모욕한 제사장들의 폐역함이었고..백성들이 그것을 모를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하겠는가?

그러니 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했다는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진실하게 직무르 수행하였다면 백성들이 왜 십일조를 적당히 하거나 대충하였겠는가? 십일조를 강조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충성스럽게 시행하였을 것이다.

진짜 십일조 도둑놈들은 바로 거짓 제사장들이며 의한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이 말라기서의 폭로인데도 오늘날 참으로 어이없게 십일조를 강조하는 목사들이 가장 즐겨 애용하는 구절이 되었으니 이 어찌 개그가 이닐 수있겠는가? 더 가관인 것은 소위 "믿음 좋고 경건하고 독실하다는" 신자들도 이러한 십일조에 아무런 저항이 없이 "믿음의 고백"이라느니 "하나님의 것을 " 인정하는 표시라는 거짓말에 동의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신앙 사상속에는 결국 "기복주의" 와 " 자기 의로움" 이 스며들었다는것을 본인들은 극구 부인하겠지만...

누가 뭐라해도 나는 " 믿음" 으로 십일조 한다는 고상한 신앙관에 빠진 지체들이 상당하다는 것이며 필자와 같이 십일조를 철저하게 배척하고 무시하는  이들을 향하여서 안티식으로 보고 믿음 없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경건하다는 분들속에 떨칠 수 없는 "자기 의" 이며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임을 알고 있다.

필자의 이러한 독설에 맘이 상할 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해는 마시라. 분명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순전함으로 드리는 분들이 왜 없겠는가? 그것을 시비하거나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드리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고 믿음이 분명해진다면 그리 하라. 누가 말리는가? 그러나 십일조를 반대한다고 해서 혀를 차거나 믿음이 의심스럽다는 따위의 생각을 하는 오해를 하지 말것을 또한 당부한다. 필자는 분명하게 주님의 복음과 상관 없는 십일조를 악용하고 이용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하여 그들이 퍼트리는 "누룩" 에 대하여 틀렸다고 말하는 것 뿐이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교훈)을 주의하라신 예수의 당부를 기억하면서 이 시대의 암적인 거짓 가르침과 사상에 대하여 까발리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인들의 무수한 절기와 율법과 제사로도 안되는 것이었다. 구원은 그런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던 바울은 그의 복음 전도 사역가운데 율법주의자들과 많은 시간을 변론하면서 그들에게 "십자가"를 전하였다.

 

지금 복음이 어쩌다가 십일조가 되었으며 주일성수가 되었으며

목사 사랑함과 교회당 건축 크게 하는것으로 전락했단 말인가!

이런 꼴을 보자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인가?

십일조를 강조해서 자기 배만 살찌우는 자들을 위해서?

눈 앞에 말씀이 열려 있건만 도무지 스스로가 생명 양식을 먹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렇게 거짓말 하는 자들에게 속는것이다.

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는데 더 무엇을 말하랴!

 

불의하고 타락한 목사들을 탓할 수 만도 없다.

교인들이 스스로가 성경을 얼마든지 읽고 깨달아서 주 예수께서 이미 행하신 구속하심과 은혜를 알수 있건만 도무지 시도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예전 중세 암흑시대는 성경이 평범한 시민들이 읽을 수 없는 독특한 언어였기에 몰라서 당했다고 하지만,

지금이야 한글만 읽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교인들이 듣고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미디어의 발달로 읽을 수가 없다면 오디오로 들을 수도 있는 편한 시대 아닌가?

어찌하여 귀한 영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단 말인가?

생명의 양식을 누구나 먹을 수 있도록 주님은 은혜를 주셨건만

어쩌자고 수 만의 기독교인들은 생명의 만나를 특수한 몇몇 사람들에게 공급을 받으려고만 할까?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독인지 쑥물인지도 모르는체 그저 아멘으로 받아 먹으니 밝히 볼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하여 분명히 말씀하셨다.

 

듣고 깨달으라!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잠언의 경고도 있다.

온갖 주일성수니 교회 봉사니 예배의식을 강조하는 기독교 속에서

사실 스스로 성경을 읽고 양식을 먹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주일 한번 빠지면 큰일나는 현대 교회의 현실이니까....

교회에 적은 하지 못하면 마치 죄를 범하는 것 같은 설교에 세뇌 당했으니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러한 모든 억암과 종교적인 것에서 십자가로 부숴버렸다는것을 믿으라!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더 이상 헛된 의식과 절기들과 종교적인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자유함을 누리라.

죽었던 나사로를 향하여서 예수는 명하였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되었고 썩어 냄세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서 예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사로야 나오라!"

 

예수의 호령소리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다.

베옷으로 칭칭 동였던 것을 예수는 당장에 풀어주라고 하셨다.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서 사람들의 영혼을 옭아매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산 성도들을 구속하는 것은 율법도 아니며 십일조도 아니며 주일성수는 더더욱 아니며 새벽기도도 아니다. 우리를 구속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예수 박에는 없다.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예수보다 더 크고 깊고 무한한 울타리가 어디있는가?

예수 안에서 구원얻은 성도들에게는 온전한 자유함이 잇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며 복음이다.

당신은 지금 예수 안에서 이러한 자유함을 맛보고 있는가?

 

2010/02/11.ⓒ 사랑그리고편지.

 

 

출처 : 거짓 신앙,거짓 교회에서 탈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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