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스크랩]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하라84 2009. 10. 25. 21:20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마가복음10:17)


여기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많은 재물을 소유한 부자이면서 젊은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젊은 부자 한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부자 청년이 뭐가 그리도 급하기에 뛰어 온것인가?

부자라면 얼마나 여유가 있는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이미지라면 여유롭다는 것이다.
언제나 한가한듯 하면서 무엇에 쫒길 이유도 없고
부족한것 때문에 초조해야할 이유도 없으며
모든것에 만족하는 것이 보통의 부자들, 혹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미지가 아닌가?

그에 비한다면 약자들...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거나 가난한 자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주인과 종의 차이가 그것이 아니겠는가?
주인에게는 남는것이 시간이다. 여유가 철철 넘친다.
아쉬울것이 없기에 누군가에게 사정을 하거나 부탁하는것보다는 오히려 들어줘야하는 형편이다. 남에게 아쉬운 소릴 하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있다.
그렇기에 어찌하든지 우리는 성공을 소원한다.

누가 가난하고 싶어하겠는가?
누가 무시당하며 살고 싶겠는가?
세상은 언제나 힘이 있는자가 지배하며
힘이 없는자는 언제나 굴욕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죄가 지배하는 인간세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것이 없다.
이 세상의 조직적이고 약육강식의 법이 전혀 없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요 흔히 말하는 '천국'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의로운 나라
영원한 그 나라에 대하여 알고 싶은가?
당신이 혹시 예수를 믿는자가 아니라면...
믿는자라고 해도 상관 없이 성경을 펼처보라!

맨 뒤에 있는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을 자주 매일 무조건 읽기를 권하고 싶다.
읽기 싫다면 맘대로 하던가...강요하지는 않는다. 궁금하면 보라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천국을 가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들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천국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소원한다고 아무나,
혹은 특별한 실력자들이 가거나 세상말로 부자들이나
권세자들이라고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시시한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개탄스러운것은...
기독교인들이...
쉽게 말해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교인또는 신자들이라고 말한다.
기독교도 세상에서는 종교의 한 종파이기에 먼저 로마 카톨릭교회와...
나는 무식해서 아직도 천주교회와 카톨릭이 어떤 관계인가 무지 헷갈리는것이 사실이다.
물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아무튼간에 천주교는 성당에 다니는 신도라고 하고
개신교파는 과거 중세 로마 카톨릭의 사제였던 루터라는 종교개혁가가 그 당시 부패하고 타락한 교황의 독단적이고 권위적인 통치에 반발하여서 새로운 교회(루터파)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그의 후예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그중에 칼빈이 대표적임)이
우후죽순처럼 나와서 장로교를 만들고...
웨슬리는 감리교를 만들고 해서 여러교단들이 생성을 하게 되었고
그들을 가리켜서 보통 개신교라고 하고 로마 교회를 구교라고 교회사가들이 구분을 했다는것으로 이해를 한다. 필자가 말하는게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소위 개신교에서는 교회라고 표현을 한다.
구교에서는 성당이라 하였으면
개신교는 교회당이나 예배당으로 하는게 더 적절할듯 하지만,
아무튼 필자는 개인적으로 개신교회에서 말하는 교회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개신교회에 목을 거는 자들은 보이는 교회로서 성경적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람이 만들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거룩한 성도들이 교회의 지체요 몸인것이다. 건물이 교회라는 주장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는것이지 건물을 건축하고 십자가 걸고 교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님은 교회(성도들)를 부르시고 찾으시고 성령으로 모으시는 것이지 사람들이 교단이나 교리를 기준으로 해서 세우는 조직이 아니다.

어떤 믿음 좋은 집사가 필자에게 이렇게 반문을 한다.
예수님 당시에 분명히 성전과 회당에서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하고 말하면서 주님이 인정을 한것이니 지금의 교회도 같은 맥락이라고 필자에게 충고한다. 그런식으로 말하면 기성 교회와 목사들에게 이단소릴 듣는다면서...

하기는 예전에 필자도 그렇게 믿고 있었기에 그 집사에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해줬다.
회당에서 주님이 설교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신것이 무엇때문인가를 생각해 보았소?
주님은 회당에서 하나님의 부르신 자들을 부르시려고 하신것이지 다른것이 아니오.

주님의 백성들을. 사도 바울이 설교할 때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이 있기에 성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복음을 들은 자들가운데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믿었다는 성경도 안보았소?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에 영광을 돌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정해진 자들은 다 믿더라.[흠정역.행13:48]>
참고: 비시디아의 안디옥의 어느 회당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전파중에서.

성령이 성도들을 부르시고 찾으시는 것이지 현대 교회나 목사의 설교처럼 전도해서 사람모아서 장소를 세우는것이 교회라고 보는것이 결코 성경이 말하는 준팀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미 교회론에서부터 기존 전통적인 신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틀린것이다. 당연히 성경을 해석하는것도 다를수 밖에...

예수께서도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고 사도들도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 이유와 목적은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들 곧, 하나님의 친 백성들을 부르시는 것이며 오늘날 기성 교회와 제도권 교회안에서도 성령이 친히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는것이라는 말이다. 필자의 졸고가 마치 교회를 부정한다고 비난하는데 필자는 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만을 찾고 신뢰하고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님이 부르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넘볼 수 없는 완전한 교회이기에 무너질 성질의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신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듯으로 세운 건물 교회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한번 보라. 일년에 교단적으로 교파적으로 얼마나 많은 개척교회들이 문을 닿고 있는가? 그 교회들이 진정 주님이 머리시고 성령이 세운 교회라면 어찌 문을 닿을 수가 있으며 사람의 물질에 의하여 어느곳은 성장하고 어느곳은 문을 닫고 또 어느곳은 세습을 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것인가?

주님의 교회를 왜 목사의 아들에게 물려주는가?
그러고도 주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다니는가?
이런 모습들이 뻔히 드러나는것을 알고도 못보는것인지 왜면하는 것인지 아니면 안보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항상 제도권 교회와 목사들은 기를 쓰고 교회를 보호하려고 하나님의 말씀 마져도 도구로서 사용하는것을 회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죄인지조차 모른다면 물론 회개하고도 관계가 없고 주님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자기들은 '천국'에 당연히 갈 수 있는것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일에 설교를 들을 때 그렇게 가르치고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간다는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것이 곧 교회를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렇게 착각하도록 세뇌시킨 사람들이 잘못이지...

어떤 비신자가 필자에게 이렇게 질문을 한다.
요즘 교회를 다니고 있는데 자기는 믿어서라기 보다 이제 나이도 먹어가고 늙어가기에
뭔가 종교적으로 마음의 평안을 원하기에 한번 다녀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문을 말하는데... 교인들은 어제까지 죄를 짓고도 주일날 가서 회개하면 깨끗하게 죄가 싹 지워지니까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비아냥대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회개와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려 죄를 사하심에 대하여 모르니까 그런불만을 하는것이겠지만 사실 신자들에게도 진정한 회개에 대하여 잘 모르는것이 더 큰일이라는 것이다.

회개의 본질을 모르니까 그저 목사의 설교에 아멘만 잘하고 교회라는 조직에 대하여 순종하고 봉사하고 십일조와 헌금을 잘내기만 하면 예수 잘믿는것이 되고 믿음이 좋은기준이 된다고 매일 세뇌를 당하니까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이 속죄제를 드려서 죄사함을 받는것에 익숙해지고 무뎌진것처럼 그렇게 된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 있는가?

교회의 중심을 담당하는 목사조차 회개가 무엇이며
천국을 어떻게 무엇을 해야 들어가는 줄로 알고 가르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어느 부자 청년이 예수 앞으로 뛰어와서 이렇게 질문을 한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한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부자 청년이 왜 이렇게 급하게 예수의 앞을 막아섰을까?
예수께서 걸음이 보통 사람들보다 빠르기라도 하신걸까?
예수께서는 빠르게 이동하실 수가 없었다.
언제나 많은 무리들로 둘워 싸여서 자주 멈추셔야만 했다.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시는등 그렇게 빨리 가는 걸음이 아니었는데
이 젊은 부자가 뛰어 온것은 아마도 이런 까닭이리라고 추측을 해본다.

먼저 이 부자에게 모든것이 만족한것 같았지만 결정적으로 '영생'에 대하여 갈급한것이다.
그가 어릴적 부터 모세오경에 익숙하였고 계명들을 잘 지킨 모범적인 유대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이라는 문제앞에서는 도무지 해결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안되는 것을 알고 고민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생들이 많이 있어서 성전이나 회당에서 훌륭한 랍비들의 설교를 들어었을 것이고 질문도 하였으나 시원하게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한것이다.

그 때에 갈리리에서온 무명의 랍비인 예수에 대하여 들었을 것이다.
그 도도하고 권위적이고 또똑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조차 예수앞에서 쩔쩔매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바로 예수를 만나야만 영생에 대하여 궁금증을 해결 할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아니 어쩌면 확신했을 것이다. 바로 이분만이 영생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분이라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이 쫒겨가고 바람과 풍랑마져 그의 권세에 순종하였다는 믿지 못할 소문은 그로 하여금 더욱 확신을 갖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즉시로 찾아오지 못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부자들에게는 사회적인 체면과 신분에 걸맞는 행실을 해야만 하는 문화가 있다.
당연히 품위 유지와 관리적인 차원에서 갈릴리의 예수를 많은 무리들이 보는가운데 만난다는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스타일이 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나기는 만나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마침 예수와 제자들만이 길에서 한가로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 늘상 모여있던 수 많은 무리들도 없었고 더구나 바리새인이나 관원들이나 서기관들도 없었으니 기회는 바로 지금이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달려온것이다.
여기까지는 참으로 이 청년은 지혜로웠다. 잘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청년이 '영생'에 대하여서는 자신이 없는것이며 솔직한 것이다.
이 청년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부자가 천국가기가 매우어렵다는 중요한 말씀을 들었다는것만으로도 이 청년은 성공한것이다. 물론 즉시로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고 행하였더라면 더욱 좋았겠지만 어쨌든간에 아무나들을 수 없는 주님의 귀한 가르침을 이 청년은 들은것이다. 주의 말씀이 곧 영생이며 생명이다. 생명의 말씀을 듣는것부터가 복이다.

문제는 이 생명의 말씀이 아무에게나 들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홍수에 마실 물이 없어 갈한다고 아모스 선지자가 말하였듯이 오늘날 도처에 넘쳐나는 설교는 많은데 정맞 생명의 말씀이 희귀한 것이며 그래서 물이없어 기갈이 아니라 말씀이 없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교와 목사는 많은데 생명의 말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인부터가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에 나오는것이 세상의 말이며 세상에 속한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들은것을 말하고 안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않았는가?

이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한다.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나는 이 모든 것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다. 별로 중요한것이아니기에 그렇다.
물론 율법주의자들과 그리스도인이라도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자들에겐 중요할 지몰라도 필자가 이해하는 거듭난 성도들과는 전혀 상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계명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가 아니라 다음 구절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 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바로 이 말씀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결코 계명을 지켰느냐 안지켰느냐로 '영생'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이 부자 청년이 다 지켰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율법지킴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영생이 곧 구원이라는 것과 동일한 것이 성경이말하는 진리이다. 구원은 율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는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오셨고 십자가로 자기 몸을 드려서 자기의 피로 구원을 주신것이지 인간의 의로움이나 행함이나 공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인간적으로 모든것을 다 지켜 행할찌라도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씀이다.

부자 청년에게 한가지 부족한것이 있는데 그것을 체우라는 말씀이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한가지가 무엇인가?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것이 주님이 믿는자들에게
구원을 원하는 자들에게
성도들에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보이는 교회에다가 십일조를 바치고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내는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고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생각은 이런것이다.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말씀이며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시행해야하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성도들이 성령안에서 행하는 삶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요 연보의 개념이다.
따라서 목사란 성경적으로 구원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성도들에게 솔직하게 가르치고 스스로가 각각의 처소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섬기는 직분을 해야하도록 부름을 받은존재이다. 이런 분명한 사명을 알고 있다면 꼭 목사 자격증이 있어야 하며 건물일 세우려고 돈돈돈 하지도 않을 것이며 목사의 체통이나 자존심 때문에 진리와 다른 발람의 길로 타협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주변의 교회와 교인들을 보라!
얼마나 더 부자가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
얼마나 교회건축을 성대하게 해야 영광을 돌릴 것인가?

어느분이 필자에게 모든 교회를 싸잡아서 비난한다고 섭섭해 하셨다.
그러면서 조언하시는 말씀이 이것이다.

<가난한 농어촌에서 고생하는 목사님들과 사모님들, 작은 셋방 교회를 차린 목사님들, 이 분들을 보고 예수님을 그리며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어찌 합니까?>

필자의 무모한 싸잡아식 교회 비판과 목사비판에 억울하게 도매금으로 욕을 당하는 이러한 분들까지 그렇게 해서 안되기에 더 이상 비판적인 글보다는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나눠달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어느정도 공감은 가지만 역시 교회관에서부터 인식이 다르니까
당연히 벽을 보고 동문서답하는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분들이 열심히 수고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결국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초라해도 실속이 있을 수가 있으며 목사라는 제도는 생각한것보다 훨씬 기능이 많다. 개척 초기에 다소 힘이 들고 해도 결국은 성장할 것이고 자리를 잡으면 목사는 웃으면서 옛날 예기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계속 존경과 물심양면으로 도움도 받을 것이다. 한마디로 참고 견디면 살만해지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 한국제도권 교회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어떤가?
일평생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특별한 경우를 예외로 하고 가난한 교인은 계속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가난한 교회라고 해도 분위기상 교인들은 열에 한두번씩은 부담을 덜어버리기 위해서라도 헌금이나 십일조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방송을 통해 우연찮게 설교를 들으면 어느 교인이 어려운 가운데 5천만원이 생겼는데 아갑지만 믿음으로 교회에 헌금으로 내었더니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그 이상의 돈이 들어 왔다는 간증을 하고는...

또 감사함으로 낸 교인의이야기를 하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설교를 하는데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지 그런 간증을 하는 이유가 뭔가? 그것도 수많은 방송 청취자들이 듣는 기독교 언론방송사에서 말이다. 이것은 결국 의도적으로 교회와 목사에게 어려워도 헌금 잘 내면 복받는다는 교묘한 말장난이다. 순진한 교인들이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진정 부자 교인들은 어쩌다 한번 생색내는 헌믁을 할 뿐 정작 가난한 교인들이 전세자금이나 푼푼히 모은 적금이나 심지어는 대출까지 받아서 건축헌금을 내었다가 결국 가난과 빛에 견디다 못해서 교회를 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면 교회는 그들이 믿음이 없거나 불신앙으로 시험에 걸려서 나갔다고 비난하기 바쁘다.
결론은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나중에가서 포기하지 않는 한은 살만큼 된다는 것이고 가난한 교인들과 노인들과 어려움에 처한 교인들만 상처받고 결국은 주님을 원망하는 길로 가는것이다. 우리는 안그런다고 말하지 말라. 우리 교단은 건전하고 심학과 교리적으로 건전하기 때문이라고 자랑하지 말라. 눈이 가리웠는가 한번 교인들을 살펴보라. 틀림없이 고통과 번민가운데 울고 있는 이들이 적잖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보내사 바로 이러한 교회안에서 주의 백성들을 불러 내신다.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하시는 일이시다. 필자의 글이 이상하게 들려지는 분들에게는 더 이상 대화가 안될 것이다. 당연하다. 서로 보는 관점과 인식이 다른데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필자는 모두에게 졸고가 환영받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주의 백성들은 들을 것이다.
아니 들릴 것이다. 주께서 부르실 백성들이 어느곳에 있는지 필자는 모른다. 그러기에 다만 부작용이 있고 이단 삼단 소리를 하고 비아냥 거리고 우이독경이라는 소릴 해도 할 수 있는데로 하고자 한다. 전혀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망상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혹시라도 필자의 글이 불편하거들랑 아무런 부담없이 통과하시라 부탁하고 싶다.

부자 청년이 주님의 처방을 듣고 어떻게 하였는가?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을 짓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 이런 설교를 하면 누가 교회에 나오겠는가? 있는 것 다 팔아서 나눠주고 교회에 오면 누가 환영하겠는가? 한마디로 거지가 되어서 교회 온다면 상수를 들고 환영을 하는 교회가 있을까? 그러나 주님은 그것 다 나눠주고 교회를 다니라고 하지 않으셨다. 유대인들 시대에 맟춰서 말한다면 회당이나 성전에 열심히 충성 봉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주님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주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사람이나 어떤 교리와 사상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보이는가?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산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의 말씀에 놀랐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하시니,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눈여겨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씀드렸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영생은 이 세상에서는 없다. 오는 세상에라야만 영생이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에만 영생이 있는것이지 이 세상에서는 영생이 없으며 아무도 영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 나라에 들어가야만 영생을 누릴 수가 있는데 그 나라가 곧 천국이며 그 나라는 영원전부터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열심과 소원함으로가 아니라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다.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께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올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시며 곧 말씀이시며 우리를 부르시고 찾으신다.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의 왕노릇 하고 있는 마귀 사단의 왕국에서 당신의 백성들읗 한사람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시고 인도하신다고 요한 복음 10장에 증거하신다.

오직 부르심을 들은 자들만이 듣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좁은 길로 좁은 문으로 순례의 길을 행하면서 매일 기쁘게 걸어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잘나거나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성령이 우리안에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이 부자 청년은 나중에 어찌 되었는지 알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만일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라면 훗날 언제인지는 몰라도 주의 말씀에 결단하고 주를 따랐으리라 생각한다. 무론 필자의개인적인 추측이니까 절대 확신하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 비유로 말씀 하실 때 두 아들에 관하여 자주 언급하심을 기억해 보라.

첫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예 하고는 가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거절하였으나 나중에 뉘우치고 가서 일을 하였다는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가? 잘 세겨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인가를 잘 분별하고 생각해야 한다.

2009/06/22. ⓒ 사랑그리고편지

 

 

 


 

출처 : 사랑 그리고 편지
글쓴이 : 사랑그리고편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