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곡님의 정성어린 댓글을 중점적으로 나눠서 간단하게 저의 입장을 대변해 보겠습니다.
파란글씨는 아곡님의 주장이시고 검은 글씨는 저의 입장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맘이 시커매서요^^)
아곡님은 성경적으로 저보다 훨씬 깊이가 있고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편적이고 단순한대 비하여 아곡님은 매우 광범위 하고 논리 정연합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저같이 즉흥적이고 단순한 사람으로서는 상당히 벅차답니다.
그렇다고 아곡님이 복음을 모르느냐 하면 아주 명확하게 이해하시고 충분히 가르치실 만한 소양과 실력도 풍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아곡님의 의견에 반대글을 적을 수 밖에 없어서 참 마음이 답답합니다.
물론 이러한 마음은 상대적으로 아곡님 역시 저의 글을 대할 때 같은 심정이라 생각해 봅니다. 말하자면 서로 답답해 하고 안쓰러워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쩝니까요. 각자의 받은 지혜와 사랑으로 혹은 믿음의 분량대로 서로를 세운다는 충심으로 살펴 보기를 소망하면서 좀 거칠지만 표현상의 한 방편으로서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면의 한계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꼭 집고 가야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라는 시간적인 개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의 율법, 즉 하나님의 계명이나 말씀과 언약도 "복음"이라고 하는 핵심을 초월할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상당히 이상한 표현이기는 합니다. 제가 써 놓고도 사실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저의 상태로는 이런 단어를 감히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복음>이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임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모든 성경은{구약=신약}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분명히 구분, 혹은 구별해야 함도 물론 동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방인에게 해당하는 부분이 있고,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부분이 있으며, 거기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일반 지파 백성들과 각 지파의 족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 해당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들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교훈 하는 이들이 아마도 율법사들이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실체"가 오시기 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만일, 지금도 예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고 십자가에 죽으심도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방 죄인으로서 유대교의 종교적인 규범들과 규칙과 십계명과 의식법과 제사법에 의하여 개종을 하거나 아니면? 여전히 이방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아래 살다가 멸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유대교의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순종> 하거나 아니면 파문,또는 출교를 당하거나 하나님 없이 자기 맘대로 살다가 심판대 앞에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이러한 불필요한 논쟁이나 변론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날 때부터 저주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해달라고 구걸하거나 그들의 비위를 잘 맞춰서 어찌하든지 구원의 반열에 오르기를 힘써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곡님의 친절한 설명과 같이 말라기가 말한 십일조는 당연히 하나님의 것임으로 내라 마라할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이나 불신이나 관계없이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으로 십일조를 해라 말아라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것일까요? 그들은 조상의 유전과 혈통으로 이미 원하든 거부하던 하나님의 선민이며 백성들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율법과 십계명을 믿어라 말라 할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연한 의무이며 삶이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6:4절 이하 참고.>
예를 든다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정상적으로 신체 건강한 청년은 반드시 군대 입대가 기본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가 만일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서 다른 국적으로 살다가 한국에 왔다면 당연히 그에게는 군대 입대가 자의적인 선택이지 강제조항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자가 정당한 건강상의 이유 없이 '난 군대 입대를 거부"한다면 그는 어찌 될까요? 이것은 믿음이나 신념과 상관 없는 의무이며 기초입니다. 따로 이것에 대하여 가르치거나 배워야 할 이유가 없이 무조건 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십일조도 당연히 해야하고 성전도 정성껏 섬겨야 하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하여 십일조를 기꺼히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물론 이방 죄인인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개종이 먼저입니다만....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이스라엘 외에 이방민족들은 율법과 상관 없기에...)이스라엘 시각으로는 율법이 없는 죄인으로서 저주 아래 있다는 고정관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간 여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멸시하고 천대하고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사람이라 배척한 이방인 출신들입니다.
대표적으로 룻기서의 룻이 <모압> 소녀입니다. 기생출신 라합은 또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던 요셉의 아들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애굽의 제사장 온(보디베라)의 딸(아스낫)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아들이며 이방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아시는지요? 무낫세와 에브라임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경륜은 율법을 초월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일조나 십계명과도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이란 바로 이렇게 사람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이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하고 신묘 막측한 하나님의 경영의 비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율법이 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율법이나 십계명이나 십일조는 전혀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만이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실체이신 그분의 의와 십자가 공로와 그의 피만이 유일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약의 하나님의 언약과 십계명과 십일조따위는 전혀 끼어들거나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이며 성도이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난 의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방인과 유대인들과 야만인이나 자유자나 종이나 구분 없이 그의 몸(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의문에 속한 문서)으로 단번에 모든 것들을 폐하시고(완성하시고) 도말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복음이 전하는 본질입니다.
따라서 복음안에서 의롭게 되어 거듭난 신약교회(성도들)에는 더 이상 구 언약이며 믿음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맡겨둔 몽학선생(율법으로 난 의)인 십계명이나 율법조항이 간섭할 이유도 없으며 근거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계명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으로 살도록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옛 사람이 십자가에 죽고 장사 되었으며 이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태어난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은 구원이며 거듭났다 하며 성령으로 산다 하는 것이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며 주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미 예언된 복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율법(돌판에 세긴 십계명-하나님이 직접 세기신 것)을 던져서 깨트려 버립니다. 감히 하나님이 주신 두 돌판을, 거룩한 십계명이 세겨진 돌판을 집어 던져 버렸습니다. 모세가 자의적인 감정만으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 전부가 사망아래 있었습니다. 시간이 나시는 분들은 출애굽 기사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히 선언 하십니다. 나를 막지 말라고 하시면서 분노하십니다. 이 백성들을 보니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들이라 하면서 전부 지면에서 멸하여 버리고 모세를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 하십니다. 물론 모세가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탄원합니다. 언약의 계명을 던저서 깨트려 버린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 제사장들로서는 결코 보아보 볼수 없고 들어도 들리지않고 읽어도 열리지 않는것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쓴 수건으로 생명의 길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춰지고 밀봉한 구약의 문을 열고 새 언약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 복음이며 구원이며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경이 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신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계명을 가르치고 율법을 존중한다 하면서도 사실은 전혀 하나님과 상관 없는 자기 열심과 자기 의를 힘써 행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직도 율법이 신약의 거듭난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복음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로 보아서 이미 복음안에 사는 성도들은 이제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당연히 복음의 실체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거나 거역한다는 것이 아니라 또는 구약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구약의 예언서나 시편을 해석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정확하게 신약의 성도들에게 풀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으시고 다시 플어서 해석하신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권세있는 교훈이며 가르침이라고 놀라워 하였습니다. 서기관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 역시 옛 사람에게 말한바 하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고 분명하게 새로운 가르침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구약을 더욱 강화 시킨 것도 아니고 율법의 연장선상도 아니며 정신을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믿는자들로 하여금 구별하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율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곡님이 인용하신 히브리서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 세움을 입은 자들에게 대하여 가르친 복음이라는 것을 먼저 주목하셔야 합니다.
<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여기서 분명 믿음이 없이는 하였습니다. 그 믿음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함이며 그것이 곧 복음입니다. 다른 말로 복음이 아니면,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십자가로 없이한 구약의 언약적인 제도에 존재하였던 십일조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한 제도이며 규범이며 이방인과 상관 없는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이 성전에다가 십일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이스라엘이 지금도 말라기서에 순종해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이라는 성전 곡간에 쌓을 곳이 없도록 채운다해도 여전히 우리 성도들과는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는 아직도 메시아(예수 그리스도)가 안왔으니까 당연한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지금도 삼대 절기를 지키건 안지키건 우리 성도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토라를 읽으면서 통곡의 벽에서 통곡하며 기도하는 것하고도 우리 성도들하고는 전혀 상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건 말건 우리 성도들하고는 전혀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성도로 변하고 옮겨진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더 이상 구약의 옛 언약 아래 있지도 않고 새 언약 안에 살기 때문이며 영적으로 아브라함과거 함께 복을 받고 하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상속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를 단 한번 했던 아브라함을 본받아서 해야 한다는 것이 복음적인지요?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바친것과 같이 성도들도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은 설마 아니시지요? 야곱이 한번 자기가 서원한 것이었지 그 후에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 성전이나 제사장도 체계적으로 세워진 것도 아닌 족장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치 초율법이라는 이상한 말로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려 하는 것도 복음과 상관 없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장차 오실 것이고 그 일을 십자가를 통해 단번에 산 제사로 속죄제물로 드려질 것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아브라함이 한 번, 그것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한 노략물가운데 십분 일을 감사함으로 드린것입니다. 생활의 십일조나 생계나 경재활동의 수입으로 드림이 아닙니다. 토지 소산물이나 밭의 경작물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자기 몸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율법이나 구약의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모형은 실체가 오면 사라집니다. 이제 사라져야할 엣 언약의 율법이나 십일조나 십계명으로 도덕 윤리 운운하며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복음이겠습니까? 이것은 믿음도 아니며 생명과도 상관 없는 지나간 시절의 그림자요 추억거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때문에,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희락과 평강과 화평과 자비와 오래 참음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근신함과 절재함으로 복음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나 성수주일과 교회당과 복음과는 전혀 상관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새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자녀들로서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시는 성령이 계속해서 믿는자들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게 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시며 생명의 복음으로만 살도록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서로 사랑하도록 힘을 주시며 긍휼함을 주시며 인내하심도 허락하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감동도 주십니다. 율법으로 부모 공경 가르치지 않아도 공경할 것이며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들과 모이기를 힘쓸 것이며 이웃의 필요를 외면할리가 없기 때문에 마치 율법이 복음과 십자가로 폐하여 졌다고 하는 것을 방탕하는 길로 살아가는양 호도하는 것이 과연 복음적일까 생각해 보시기를 권면해드립니다.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 조항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에게나 범죄한 영혼들에게나 상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더 이상 율법이나 십계명이나 십일조 따위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율법으로 가자고 하지도 않으며 십일조를 언급 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성전이나 성수 주일하고는 더 더욱 상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로 화평을 이루신 주님께 감사함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자주 모이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종교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즉 , 복음이 없는 곳에서는 형식과 의식과 온갖 율법적인 옛 언약의 굴레 밖에는 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깨트려 버린 사망의 법의 조문들을 다시 찾아서 공부하고 가르친다는 것은 전혀 복음과 십자가와 무관한 종교적 행위이며 조직이며 집단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복음으로 십일조도 폐하여 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무슨 율법이며 십일조며 계명따위가 간섭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까?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 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이제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이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무슨 십일조가 해당사항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 서신서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반드시 시행해야할 것이라고 누누히 강조해야 합니다. 어느 서신서에 있는지요? 초대 교회 성도들과 공동체에 과연 어디 십일조를 행하였다는 보도가 있는지요? 너무 당연한 것이라서 기록하지 않았다는 추론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나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먹고 살 방편이 되기에 그런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로마서에 기록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율법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의 말씀이구요.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19:17-18>
성령과 함께 하는 성도라면 율법과 상관 없이 당연하게 알고 행할 것들입니다.
신명기 6:5절 말씀과 위 레위기 말씀이 마 22:37-40절의 예수님 말씀과 다른지요.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롬 10:2-3>
율법의 의와 인과 신 즉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지고 믿음에 의지하여 지켜야 하는 법임을 알지 못하고 행위에 의지하여 외식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지니라 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거듭난 성도들에게 하심이 아니라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는 것임을 아직도 구분을 못하신다니오. 이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었습니다. 아곡님도 언급한 것처럼 성도들에게 말함이 아니라 외식한 자들이며 곧 거듭남이 없는 육에 속한 종교인들에게 말씀하신것을...성도들에게 적용시킨다니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이것은 소위 신학좀 했다거나 성경좀 안다는 자들과 목사들의 주요 단골 방어용이랍니다. 십일조를 끝까지 포기 못하겠으며 반드시 받아 먹겠다는 사이비 목사들의 단골메뉴입니다. 그것도 복음적으로 해석한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위에 주님의 말씀은 결코,성도들에게 가르침이 아닙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버리고 또 그 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컫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컫음을 받으리라 마 5:17-19>
그렇습니다. 저는 차라리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으렵니다. 아주 작은자로 일컬음 받는것이 소원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이 불교의 자비와 다른 것은 그 사랑이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동성연애자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만 좇아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금한 악을 행치 않도록 인도하십니다. 왜냐면 진리와 함께 가는 사랑이니까요. 연보와 십일조,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 인색하지 않게 억지로 하지 않고 즐겨 내는 것이 서로 무관한 내용들이 아니고 신약의 말씀은 구약과 연결, 인용되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성령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다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의 말씀은 구약과 서로 연결되어진 것을 넘어서서 새롭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라와 하지 말라를 신약에서는, 즉 복음 안에서는 자유함과 인내함과 긍휼함으로 새롭게 살도록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십일조 하는것 하고 전혀 상관 없습니다. 우리의 보물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나머지 아곡님의 글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미 충분하게 표현하였기에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제가 단지 일부 목사들에게 과도하게 십일조가 그들의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한 반발심으로 반대한다고 생각하는것은 오해십니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저하고 상관 없습니다. 이 땅에서 부를 축적하고 떵떵거리며 호화스럽게 살든 말든 상관 하지 않습니다. 건물 교회를 수백억원씩 처 발라서 짓어놓고 아들에게 물려주든 말든 저하고는 상관 없습니다. 그들이 율법주의로 가르치든 말든 상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상관 없는 자들까지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관심은 교회개혁도 아니고 개척도 아닙니다. 개량은 더 더욱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복음을 듣고 믿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할 성도들에게 관심 있을 뿐입니다. 복음과 상관 없는 삯군 먹사들과 종교 사기꾼들에게 세뇌당하면서 일생을 거짓 예수와 거짓 신앙에 빠진것도 모르는체 방항하는 이들에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주재도 못되면서 이렇게 욕을 먹어 가면서 십일조 반대와 성수주일 반대와 율법폐지에 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그러함이 복음도 아니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장사해 먹는 자들에게 속는 이들을 향한 안타까움 입니다. 가장 시급한 것이 십일조는 복음도 아니며 성도들과 상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을 말하면서도 이렇게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답답합니다. 성경은 균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균형이나 행위를 요구함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살고 복음으로 행하는 것을 요청합니다. 복음은 율법과 전혀 다릅니다. 율법과 선지가가 세례 요한의 때까지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 까지 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믿음이 오셨습니다. 구원의 말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지는 성도들에게 보증으로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서신서를 기록하게 하시고 이제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전해졌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믿고 의롭게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사도들의 복음편지가 모든 삶의 우선 순위이며 기준이며 행하여야할 삶의 표준입니다. 율법과 십계명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복음은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이며,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이러함이 없이 오직 멍에와 무거운 계명지킴이나 절기 지킴이로 전락하게 한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미리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오라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오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을 얻고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그가 구레네 시몬이든지 십자가에 달린 강도든지 말입니다. 그가 니고데모라도 복음 안에서는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가 부자 청년으로서 영생을 찾아 왔다해도 복음안으로 들어오면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가 세리장이라 해도 복음 안으로만 들어 온다면 그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가 혈루증으로 죽을 고생을 하였다 해도 복음 안으로만 들어오면 깨끗함을 받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소리친 바디메오라도 복음 안으로만 들어오면 생명과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도 복음으로 들어오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 예수 그 이름 안에 들어 있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음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무슨 십계명 준수나 율법이나 초율법적인 십일조는 전혀 상관 없는 것입니다. 율법아래 있을 때만 해당사항 있는 것입니다. 세상 초등학문에 있을 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을 때 방탕함으로 살 때 하나님 없이 살 때나 율법이 율법으로서 해당 사항 있는 것입니다.
죽어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난 나사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하신 그 말씀앞에 죽었던 사람이 무덤 에서 나왔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으로 들어 오면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가 선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자유입니다. 이 자유함은 방종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의 해방입니다. 결코 방탕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칭칭 싸매었던 죽은 자가 복음으로 살아나면 옛 옷들은 다 벗어 던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듯이 말입니다. 죄 악을 버리고 옛 습관를 버리고 의와 거룩함으로 지은 새사람으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 안에서의 성도들에게 율법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당신이 만일 복음으로 산다면 이 말이 이해가 될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복음으로 산다는 것이 율법을 기준으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면 다시 거듭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가운데 복음서와 서신서를 집중적으로 읽으십시오. 사람의 말을 쫓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전한 복음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분명 새롭게 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복음으로 살고 복음을 기뻐하며 복음으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으로 길지만 복음으로 율법과 십일조와 전혀 상관 없는 관계임을 증거하며 마칩니다.
차라리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기를 원하면서....
2009/11/06.ⓒ 사랑그리고편지
'율법과 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Re:십일조(tithe) (0) | 2009.11.12 |
---|---|
[스크랩]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0) | 2009.10.25 |
[스크랩]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의 만남은? (0) | 2009.10.25 |
[스크랩] 율법은 복음과 십자가로 폐하여 졌습니다. (0) | 2009.10.25 |
[스크랩] 율법에서 복음으로 나아온 성도들에게 권합니다~! (0) | 2009.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