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스크랩]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 예수의 만남은?

사하라84 2009. 10. 25. 21:19
말씀을 읽어가다가 아주 중요한 장면에서 잠시 멈췄습니다.
오늘 제가 읽은 본문은 누가복음 11장입니다.(눅11:37-54)

저는 개인적으로 따로 교회를 출썩하거나 그러지 않고
가정에서 아내와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환경적으로 그렇게 인도하셨다고 믿습니다.
벌써 7~8년은 교회에 출썩이 불가하였기에...
그 당시만해도 뭔가 눌리는 듯함에 답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비록 어릴적부터 교회와 인연이 있었던것은 아니지만
한 십여년을 장로교단에 속한 합동측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 당시에는 은혜와 감동도 적잖이 받은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그리고편지' 라는 닉네임으로 여러 싸이트에
대부분 기성 교회와 교단과 목사제도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다르다는 비판적인 글들을 주로 올리다보니 저에 대하여 궁금해 하시며
교회는 다니고 있느냐는등 메일이나 쪽지로 문의가 종종 들어옵니다.

아마도 그분들 중에는 이미 저를 이단이나 혹은 이단의 영향에 빠진 것으로
치부하는 부분이
대부분이라 짐작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어떤 분들은 진정으로 교제의 악수를 요청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 글이 워낙 두서가 없이 생각이 나열되는 형식이라서
논리적이거나 기승전결식 설교원고에 익숙하신
특히나 개혁주의 목사님들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제 단순한 글을 이해하지 못하신다는 댓글들을 접하기도 합니다.
정말 이해를 못하신것인지
아니면 제 글에 반대입장을 그런식으로 표명하신것인지는 몰라도

요청하기를 '그렇게 혼자 일방적으로 말하는 방식으로 하지 말고
구별하여서 정리를 해달라'는 주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재미난 것은
동일한 저의 글을 읽고 반응하는 것이 참 재미가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당신글은 헷갈리고 동의할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오류가 많이 포함되었다는 점잖은 지적과 함께

좋은글을 쓸 수 있는 책이라도 원한다면 추천해 줄테니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시기도 하는반면에
어느 싸이트에서는
그래도 예쁘게 봐주시고 전혀 무리 없이 소화해 내는 반응을 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분석해본다면,
아마도 제 글이 기존 목사와 교회 제도적인 부분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것이기에
당연히 정통 교회 목사님들의 눈에는
달가울리가 없다는 것이고,
그러한 제도권 교회에 회의와 실망을 경험한 분들은
충분히 공감한다는 어쩔수 없는 현상입니다.


또 이야기가 길어 지는군요.
왜 이런소릴 먼저 하는가 하면 저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계신
독자들의(부정적&긍정적)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려야 한다는
가당치도 않은 부담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교회를 나가지 못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것이 "예배" 였습니다.
아니러니 하게도 매 주일 예배를 정확하게
오전 11시에 맟춰서 엉성하지만 형식을 유지하고서 계속 가정에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당시 강도사라는 직분이 있었기에
집에서 개척한다는 자부심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그렇게 해왔습니다.
수요일도 저의시간 형편상 오전 11시로 맟췄습니다.
금요일이나 화요일, 월요일은 가정예배로 대치하였고
토요일은 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벌써 편의점에 야간 근무자로 일한것이 5년이 넘었습니다.
저녁 10시 부터 아침 9시까지 일합니다.
조건은 전혀 형편없으며 말도 안되는 장소입니다만...

그러니 아내의 입장에서는
늘 형식이라도 잘 지켜야 한다는 그동안의 교회에서 배운 영향때문에

조그마한 실수나 헛점도 용납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상 그런 부분때문에 신경전이 혹은 실랑이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다 하자면 지면이 부족하니 이만하기로 하고요.
저는 이미 말씀과 성령의 깨우쳐 주신 은혜로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의 본질과 지금의 제도권 교회와는 다르다는것을

확인하였기에 형식과 규칙에 대하여 불편하였었고
아내는 아내의 그동안의 영향아래서
충족되지 못하는 불만족감에 늘 원망과 형식적인
저의무능함에 그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을 확인한 저로서는
그러한 환경의 어떠함과 조건따위는 중요한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진정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냐이지요.

하지만 현실속에서의 교회와 성도와의 미묘한 보여지는 어떠함은
언제나 진정한 의미의 구원과
복음안에서, 은혜안에서의 자유함의 크고 놀라운 기쁨을
가로막는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십일조는 방송설교의 대부분으로 청취자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고 놔주지를 않았으며
주일성수와 목사는 하나님의 택함 받은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는 어이없는 세뇌화 작업은
지금도 기독교를 표방하는 방송과 미디어를 지배하고 있다는데 경악을 금치않을수가 없었고...
그러한 비 성경적인 지금의 교회 문화에 대하여 더 이상 계속 같이 갈수 없어서
어느날 아내와 대화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상상하시겠지만...
엄청난 전쟁을 치뤄야만 했습니다.

저의 주장은...
십일조와 주일성수는 성경에도 없는 것이고 주님이 명하신적도 없다는 것이고
당연히 교회력에서 가르치는 각종 절기예배와 형식들은
성경과 틀리니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입장에서 얼마나 놀라 자빠졌겠습니까?
저보고 이단에 빠졌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지요.

지금이라도 동네 교회에 혼자라도 가야겠다고 하더군요.
맘대로 하라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성격이워낙 강직한것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는 정말 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그동안 화를 잘 안내던 제가 극도로 흥분까지 했고 비장하게 결단까지 하였습니다.
가정이 깨어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러나 물러설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물러서면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일단 냉각상태에서 침묵기로 돌아섰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할게 아닌데...
그러나 말씀을 찬찬히 읽고 나눠야 하는데 전혀 그것을 거부하고
그동안 교회에서 듣고 배운 교리와 문화적인 것으로서
교회 제도를 거부하는것은 이단적이고 사단적이라는

아내의 인식때문에 전혀 소통은 시작도 못하고서
일방적으로 제가 이단으로 전락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서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저도 답답한것처럼 아내의 입장에서도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일단 저녁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억지로 잠을 청해야만 했었고
아내 역시 지나친 감정싸움으로 내가 피곤하면 직장일에 힘든걸 알기에
서로 약속이나 한것처럼 암묵적으로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였습니다.

내가 피곤해서 신경이 예민했는가 보다고...
아내역시 제 상황을 알기에 어쩌면 스트레스가 싸여서 라고 말하면서도
그냥 성경대로 믿으라고만 말합니다.
자꾸만 교회와 목사들의 부정적인 것들을 비판하지 말고
목사들이 흔히 말하는 레파토리를 말하면서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순간적으로 지금 내가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한것을 후회하였던 중이라서
알았다고 수긍을 하였습니다.

잠시간의 애매한 평화 협정을 유지하면서 잠을 청합니다.
자면서 기도한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친히 알게 하시고 보게 하여 주세요.
제가 설득한다고 될일이 아님을 압니다.
한 성령안에서 서로 하나되기를 원합니다.
바른 진리안에서 같은 믿음의 본질과 구원을 보고 느끼고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내 힘으로 되는것이 아니라 주께서 친히 행하실 것을 기도하고 잠을 잡니다.

아마도 내가 잠든 사이에 아내 역시 기도할 것입니다.
저를 위해서 말입니다.
또한 말씀을 묵상할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퇴근을 하여 아내와 대화를 하는 중에 깜짝 놀랐습니다.
혼자 말씀을 묵상하는데 이러이러 하더라 하고는 관련 부분을 신나게 보여 줍니다.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설교할 때 여러번 말한 것인데
지금에서야 이해를 하는군' 하고 말입니다.

주께서 직접 행하셔야 함을 알았습니다.

지면 관계상 간략하게 쓰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십일조 문제만 해도 아내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감으로 하였고 안하면 죄의식때문에...
그러나 어느날 말씀을 읽던 아내가 다시한번 내게 물어 봅니다.
십일조는 정말 구약시대에만 필요한것인가?
그동안 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언성을 높였었는데...
옳다구나 하면서 신약시대에 예수께서 십자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가? 라고 확인하였습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와 율법과 형식은 예수 오시기 전까지만 한시적으로 만들어 놓은것이며
이제 십자가로 다 완성하셨다는것을 알지 않느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신 구원을 받아 누리는 삶이 있을 뿐
다시 구약시대로 가야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백번을 양보해서 십일조를 해도 안해도 전혀 공로도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불신도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성경에서 함께 찾아 보았습니다.


아내는 아직도 완전하게 수용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은 이해를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최근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사건으로
온통 난리속에서 결국은 한가닥 희망을 잡고 있었던

현 정권의 행보를 보고서 사태를 분명하게 확인하게 된것이었습니다.
계속해서 그동안 제가 큰소리 쳤던 제도권 교회와 부패한 지도자들의 비성경적인 모습들이
아내의 눈에 정확하게 비춰진 것입니다.
그동안 티브이 뉴스조차도 시청하기를 꺼려 하였던 아내였습니다.
오로지 복음 방송을 전한다는 방송과
설교 목사들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생각했었던 아내에게는...

말씀을 계속 묵상한것과
전혀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눈이 떠진 것입니다.

이제는 설교를 듣지 않겠다고 합니다.
번영과 축복설교의 온상에서 뭘 기대하겠다는 것인가 하면서 말하는것을 보고...

그렇구나.
주님이 이렇게 간단하게 열어 보여 주시는 구나 하였습니다.
그것은 계속적인 성경 묵상의 한 결과이기도 한것을 저는 압니다.
이제는 그동안 막혔던 저와의 대화가 물꼬가 터졌습니다.

늘 근심과 쓸데없는 비교의식과
형식적인 부분에서의 부족함 때문에 염려하였던 아내가
더 이상 기존 조직과 제도권 교회에 대하여 다른 입장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말씀을 통한 예배에 얼마나 큰 위로와 기쁨을 누리는지 신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성경이 열리니까 진리와 비 진리가 보이고
복음과 율법이 보이고
은혜와 긍휼하심이 보여서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비록 방한칸에서 오직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읽는것 뿐이지만
그동안 교회안에서 드렸던 예배와 전혀 다른 진정한 예배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미주알 고주알 글을 쓰는 이유는
어느곳이나 신앙상담 게시판에 보면
예배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 때문에
고민하고 방황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단 사이비와 삯군들에게 속았다는것을 알면서도
단지 교회 건물과 목사와 여러가지 제도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거짓된 장소를 벗어나는것을 너무 어려워 하거나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인도해야만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그릇된 그동안의 거짓 가르침들...
성찬에 대하여 반드시 교회와 목사라는
성직자들만이 주체를 해야한다는 거짓된 가르침과 사상들...

세례와 침례는 반드시 성직자(목사와 장로) 가 행하여야 한다는 희안한 권위의식들...
오로지 교회 중심 목사중심이 되어버린 부패한 조직화된 교회를 마치
하나님이 세운 것이라고 교묘하게
속이는 그동안의 그릇된 가르침들....

주님이 전혀 인정하지도 않은
제도와 교권과 종교적인 우상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득권자들과

그들의 뒤를 따라가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판을 치는 이 시대속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함을 믿는 성도들이 곧 성전이며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은것을 알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로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아버지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거룩한
존재임을 알고 삶의 예배자로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예배 장소가 중요하지만 절대적인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은 우리가 주님을 알고 진실로 믿고 그 은혜안에서 누리는 누림과 쉼입니다.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주께 은혜에 보답해야 겠다는 인간적인 헛된 종교성에서 벗어나서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바라 보는것임을 알기를 원합니다.
제가 제도적인 교회와 목사제도와 여러가지를 거부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진실로 성령의 역사하심과
오직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에
걸림과 막힘을 요구한다는 속성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어떻게 나왔습니까?
모세의 지도력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온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그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안고 나온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심도 하나님이시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우심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순종을 잘해서가 아니라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맹세하신 약속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안에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찌 설교자 라고만 하는지요?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이 목사라는 것이며 오늘날 목사들의 역할이 선지자와 같다는것입니까?
특히 칼빈의 영향아래 있는 개혁주의 교단에서 교회의 표지를 그렇게 정하고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의 표지가 말씀과 성례전이라고 말합니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주님이 언제 교회의 표지를 그렇게 가르쳤는지요?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주인이시고 다스리시며 세우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로 믿어지는 자들이 곧 성도요 그들이 곧 교회의 지체들이며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기를
성도들이 사도들이 전한 바 주의 만찬을 기념하여서
주님 오실 때까지 기념하라고하신것입니다.

목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사도들과 함께 떡과 잔을 나누는 식사공동체입니다.
성찬식이며 애찬식입니다.
쉽게말해서
밥상공동체마다 모여서 떡을 뗄 때마다 주께서 친히 행하신 십자가의 구속하심을 알고
생각하고 감사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매일 매일이 주일이며 부활하신 날이며 주의 날입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과 날과 달과 여러가지 것들이 전부 주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며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들과 떡을 떼며
서로의 필요를 위하여 수고하며 헌신하며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지체들을 돌아보아 그들을 섬기는 것이
주를 섬기는 것이며 예배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예배한다고 가정예배라고 단정하는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곳이 예배처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주님이 거니시던 그 거리와 빈들과 장소가 바로 예배처소입니다.
주님이 떡을 떼시며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면 그곳이 예배당입니다.
거기 둘러 모인 무리들이 곧 교회요 예배자들입니다.
오병이어의 현장이 바로 예배처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고기 잡으러간 제자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고기를 잡지못한 갈릴리 바닷가에 오셨습니다.

제자들이 시장할까 손수 조반을 준비하시고
제자들에게 생선을 달라하여서 굽고 받아 먹으라 하십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베드로를 잔잔하게 부르시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시던 그 때 그 장소가 바로 예배 처소이며 예배입니다.

삭게오의 집에 들어가신 그 장소가 예배장소입니다.
마르다는 분주하였고 마리아는 말씀듣기 위하여 앉아있던 그 방이 예배처소입니다.
사울이 삼일을 식음을 전패하고 누었던 그 자리에
아나니아가 가서 '형제 사울아 주께서 너로 보게 하신다' 하고

기도하던 그곳이 예배처소입니다.

감옥에 앉아서 깊은 밤 실라와 바울이 주를 찬양하던 그 장소가 곧 예배처소입니다.
아직도 건물교회와 목사와 성가대가 있는곳만이 예배장소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가 없으면, 설교자가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없습니까?
우리손에 들려져 있는 기록된 성경은 그럼 뭘까요?
그 성경이 라틴어로 되어서 읽기 어려우신가요?
영어나 독일어로 되었나요?
아하!

헬라어나 히브리어나 아람어입니까?
그래서 전문가인 목사가 설명해줘야 이해가 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성경 사전이나 참고서는 다 무엇입니까?
원어를 알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수 있다고요?
그렇게 원어를 독해하시는 신학교수들과 박사 목사님들이 지금 하고 있는
교회 행정과
현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다시한번 중간으로 돌아가서
선지자들이 지금의 목사들이하는 영적인 영역이라고 한다면
왜 오늘날 전혀 선지자적인 말씀과 선포가 없습니까?
기득권들과 사람들이 만든 제도나 전통이 분명 주님의 가르침과 전혀 다름에도
그것에 대하여 선포하는 선지자적인 설교자들이 거의없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요?
자기들의 교리와 교단 헌법과 다르게 하면
성경대로 말하고 따르는 자들을 싸잡아서 이단으로 지목하고
정죄하는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수 있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이 동행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이며 예배장소입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며 함께 하시는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겠다고요?
그러한 교회를 찾으시는 군요?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듣고 믿어진다면...
당신이 바로 교회이며 예배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자꾸만 멀리서 찾으려고 헤메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먹고 마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계시는 그 곳이 교회입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릴까 염려가 되십니까?
주님이 뭔가 특별하고 엄청난 것을 원하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교회의 본질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무엇을 더하거나 보탤것이 전혀 없고 부족한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님으로 충만한데 무엇이 필요하리요?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 보이는 조직과 제도권 안에서의 건물 교회는
여전히 다양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주님 한분이면 충분한것을....

목사도 있어야 하고 장로도 있어야 하고
주차장도 있어야 하고 헌금 바구니도 있어야 하고
여러 부서가 필요하고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늘 부족하다고 밤낮 부르짖습니다.
주여..주시옵소서가 노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맨날 이것달라 저것도달라 울고 불고 때를 쓰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잠도 안자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부르짖으면 그것을 과연 주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생각좀 해보고서 브르짖던 울던 해야합니다.
자녀들이 재미나게 즐겁게 잘 놀고있을때 부모는 좋아합니다.

오히려 얘들아 뭣줄까? 하면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해요.
이러면 부모는 더 필요한게 없나 살피게 되면서도 흐믓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안에서는 무엇이든지 간절하게 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엉터리성경 해설을 인용해서 입을 크게 열라 하고 가르치는 모양이라니...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만 가르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구하기 전에 찾기전에 부르기전에 내가 여기 있다 대답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신다고 하시는데도...

여전히 구하라고 요구합니다.
거기에 과연 주님이 계신것이 맞습니까? 제 말이 너무 교만스러운가요?

제가 이렇듯이 시시콜콜이 혹은 시비하듯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거짓과 속임속에서 나오기를 두려워 하는 단 한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본문 말씀을 하나도 적용을 못하였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쓰려고 한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여러분이 직접 찾아서 읽어 보시면 거기에 다 해설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덧붙일 것도 없고 뺄것도 없습니다.

그냠 주님의 말씀 그대로 천천히 또박또박 소리 내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보시면
바리새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과 당시 바리새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절묘하게 닮았다고 생각이 되는지요.

저만 그렇게 보인다면 제가 잘못되었을 것입니다만...
그 말씀을 정확하게 읽는자라면 주님앞에 바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아직도 갈길이 멀었다고 봅니다.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아마도 모든것을 내려 놓을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내가 잡고 있는 그 어떠함이 무엇이던간에...
그것이 만일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어 버려야만 살길이 열립니다.
영적인 풍성함은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영적 파산 상태자들은 필요하고 부족한게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되면 당회장이 되어야 하고
노회임원이 되어야 하고
총회에도 한자리 해야 하고

교회건물도 평수를 늘려야 하고
교인들도 더 많아져야 하고

이것 저것들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서 이 모든것들이 필요하다고 밤낮 부르짖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목사라는 자리를 내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대형교회에서 목사를 사퇴시키는 자들과 고수하려는 자들간에 싸움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것을 보면서
저들은 정말로 주님 한분으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이로구나 판단해버립니다.

만일 그들이 진정으로 주님으로만 충분하다고 평소에 믿는자들이었다면
훌훌 털고서 나올수 있는 여유와 담대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거기서 나온들 쫒겨난들 무슨 큰일이라도 되며
무엇이 그리도 억울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도 하셨는데...
누가 그들더러 죽으라고 한것도 아닐진데
명예와 자리를 보전하고자 몸부림을 치는 모양은 결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 할수 없습니다.

제 글이 길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실력이 부족한 것이고
둘째는 이 글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다시 다음 글을 생각하고 검토해서 올린다는것은 우리의 바램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은 영원한 내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언제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역시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랬으니까 내일은 좀더 잘해 봐야한다는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희망사항이라는...
내일 우리가 다시 만나서 이야기할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다양한 내용들을 담으려 하다보니 자꾸만 길어지게 됩니다.
예배와 신앙에 대하여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마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단순합니다.
구원도 단순합니다.
진리도 단순합니다.
복잡하지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몸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살아 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을 듣고 마음에 믿어졌다면 이제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확인하면서 기쁨으로 주의 이름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곡조를 달아서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그 감사함으로 일상생활에서 여유와 만족함으로 이웃들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미 예수로 만족한 것이 충만하다면
여러분 자체가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입니다.
성경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니
사영리를 아십니까 하고
영접기도 시키는 것을 하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전도 특공대로 그렇게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이미 내 안에 계신 예수로도 풍성한데
그렇다면 저절로 나를 통해서 예수의 향기가 풍겨나오겠지요?
사람을 억지로 모으려고 무리수를 두거나 이벤트를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찾으시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가느냐 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이 정성이 나의약간의 만족을 줄수는 있어도 그런것에 속으면 큰일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어야 참다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초기 제자들의 삶이 오직 예수로만 충만한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교회는 많고
목사도 넘쳐나는데
교인들은 넘치고 있지만
정작 예수만으로 만족해 하는 성도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야 많이 있겠습니다만...
바라기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오는
성령의 풍성하신 은혜와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2009/07/09.ⓒ사랑그리고편지 올림.

 

출처 : 사랑 그리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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