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

[스크랩] Re:십일조(tithe)

사하라84 2009. 11. 12. 21:36

 

십일조(tithe)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이

7 형제의 예를 들어 예수님께 질문을 했을 때 대답하시기를

" 너희가 성경을 모르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몰라서 오해하고 있다" 고 하시면서

" 아주 심하게 잘못 되었다"고 하시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들은 성경을 들고 다니는 자들로 성경을 모를리가 없고

알기는 알되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지금도 많이 있다고 본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이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신약과 구약 중에서

 

(1) 신약과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 같다.

(2) 신약이 구약 보다 더 중요하다.

(3) 구약이 신약 보다 더 중요하다.

 

 

이 중에서 정답은 무엇일까?

 

 

대부분 특히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1)번을 정답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대답이다.

 

(2)번이 정답이고 신약이  구약 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대답하는 자가

성경을 제대로 아는 자라고 말하고 싶다.

 

 

신약과 구약을 구분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히브리서 1장 1절-2절 말씀이다.

 

 

지나간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번,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시었고,( 구약)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시었다.(신약)

 

산상 수훈에서는 " 너희가 옛 사람들에게 한 말을 들었거니와(구약),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신약) 라고 하시었고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고

그의 말을 들을 때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고 거듭 거듭 강조 하신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 까지이고 (구약), 그때 부터는 천국 복음이 전파 되고 (신약)

요한은 여자가 난 자 중에서 가장 큰 자이지만 천국( 복음- 신약)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 구약-율법) 보다 더 크다고 하시었고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 구약- 율법) 보다 더 낫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시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그 대답은 明明 白白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완전한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왔다고 했고

바울은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가 왔으니

불완전한 율법은 페기 처분(obsolete)하라고 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안내자요 몽학 선생으로 그 임무가 끝났고

이제는 소용도 없고(useless), 쓸모도 없으니 (worthless)

더 이상 만지지도, 맛 보지도, 붙잡지도 말라고 한다.

 

 

바울은 순수 복음 주의 자이고 100% 예수 주의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예수 만이고, 예수 뿐이고, 예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 만이 100의 자유와 100의 평안을 줄 수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 100의 자유와 함께 100의 평안을 누릴 수가 있다.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기 위해 바울은 모든 것을 쓰레기로 버리었다.   

 

 

가지기 위해 버린 것이고 버리지 않으면 가지지 못한다.

캄캄한 밤 중에 촛불은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전깃불이 들어 왔다.

 이제 촛불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꺼야 한다.

박물관에 진열시키거나 고물상에 팔아야 한다. ( 실체가 왔으니 그림자는 사라져야 한다.)

전깃불이 들어 왔는데도 아직도 촛불을 들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만큼 전깃불(하나님의 아들)의 능력과 효력을 믿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왔는데도 아직도 부족한 무엇이 있는가?

 

 

 

바울은 너희들이 열심은 있으나 옳바른 지식 위에 기초를 두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끝나겠느냐?고 묻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신약은 새 시대이고 새 시대에는 새로운 법이 있다.

구약과 신약은 결코 같지 아니하고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고 

만약 같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의미가 없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십계명 중의 하나로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돌로 때려 죽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음으로

거기에 매이지 말고 거기에서 벗어 나라고 가르치고

오히려 그날을 제대로 지키려는 자들을 이단 취급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

 

 

바울은 어떤 날을 다른 날 보다 더 거룩하게 여길 수가 있고

모든 날을 똑 같이 여길 수가 있으나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각자의 마음에 결정하라고 하였고,

먹고 마시는 것과 안식일로 인하여 비판을 받지 말라고 하였으며

떤 날을 특별히 지키려는 것에 대하여 복음의 무효화를 염려 하였다.

(성경에 주일 성수라는 말은 없다. 사람이 만든 말이다.)

 

 

구약에서는 할례를 하였으나 신약에서는 할례를 하고 안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약에서는 음식을 가려 먹었으나 신약에서는 음식을 가려 먹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선언 하시었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한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구약의 십계명은 신약(산상 수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 해석 하시었다.

 

십일조는 구약 말라기에 기록 되어있다.

 

신약에서는 마태 23장, 禍와 저주의 장에 기록 되어 있다.

7가지 禍중에 4번째 禍에 속한다.

 

한마디로 신약에서는 칭찬과 인정의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십일조 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는 자들에게

그런 것을 가지고 내 앞에서 입을 벌리는냐?는 식이고,

 

소경 된 인도자들이여

너희가 하루 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고 하시면서 禍와 저주를 발 하시었다.

 

 

십일조는 하루 살이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를 약대적 의미로 강조하고 확대 할 때에 禍와 저주의 대상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일조를 하루 살이에 비유 하였고,

 

바울은 하루 살이로도 취급지 않았다.

 

 

하루 살이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별 큰 의미가 없는, 있으나 마나 한 것

만약 바울이 십일조를 말 하였다면 그는 바울이 아니고 一口二言 者에 지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살지만 자기는 이 권리를 행사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는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주라고 명령 하시었고,

바울은 내 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 할 때 공짜로 준 것이라고 했으며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하나의 짐도 지우지 않기 위해 밤 낮으로 열심히 일 했고

많은 사람들과 같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익을 위해 행상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십일조를 말했다면 一口二言 者가 아닌가?

 

 

바울은 "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라고 했는데

나는 "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느냐?" 고 묻고 싶다.

 (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이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를 아느냐?

하루 살이 십일조는 걸러내어 그토록 중요시 하고 강조하면서

약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는 꿀꺽 삼켜 흔적도 없다.

하루 살이 십일조는 보는데 약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는 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루살이로,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보는데 이들을 향하여

禍와 저주를 발하고 있는 더 크고 중요한 사실을 보지 못하니  

소경들이고 禍와 저주의 대상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하시었다.

본래 가난 하기 때문도 아니고 가난이 좋아서도 아니며

우리를 가난의 저주와 불행에서 건지시기 위해 가난하시었다.

(그의 죽으심의 은혜와 똑 같은 이유이다.)

 

 

그는 본래 부자였으나 너희를 위해 가난하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통하여

부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고린도 후서 8장 9절에 기록 되어 있다.

 

 

십자가 죽음의 고통은 6시간 동안이었으나 그의 가난하심은 33년을 가난하시었고

그는 머리 둘 곳도 없는  노숙자 이었다.

이 엄청난 가난하심의 은혜는 덮어 두고 십일조 만 들고 야단인가?

 

 

십일조는 돈이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는 당장 돈이 안 되기 때문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강도들, 노략질하는 이리떼들이라고 외치시고

아버지의 집을 시장 터로 만든다고 하였으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행상을 하며

하나님을 경제적 이익의 수단으로 삼고  탐욕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고 있다고 하였을까? 

 

 

하나님과 돈 둘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데 지금 무엇을 택하였는가?

 

 

거짓 선지자란 돈을 택한자를 말하고 그들은 외친다. 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그들은 돈이 곧 보물이고 돈이 마음과 믿음의 척도이고 기준이고

그들의 마음은 돈에 곧 땅에 있는 것이다.     

 

 

하루 살이에 지나지 않는 십일조를 약대적의 의미로 강조하고 외치는 자들이여,

정말로 십일조가 그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의 은혜와 축복은 어디로 갔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죽으시었고,

우리를 가난의 불행과 저주에서 건지시기 위해 가난하시었으며,

우리를 질병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위해 아프시고 고통을 당 하시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잘 되고, 만사가 잘 되며, 강건 해진다.

 

 

인간의 3大 문제인 죽음과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해결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되지 못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yes요, key로서

그에게는 no가 없고, 있을 수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이시고 전부이시다.

 

그는 처음이고 나중이시며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다.

 

(인간은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는 자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 자체이시다.)

그러기에 뉘에게로 가오리까?라는 고백이 나오고

죽음이 그를 가두지 못하여 다시 살아 나셨고 영원히 사신다.

 

 

바울은 네 마음을 하늘에 두라고 하면서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하였으니

네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라는 것이고

네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네 눈은 예수 그리스도 만을 보라고 한다.

네 말과 행동의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고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끝 내야한다.

 

 

오늘 날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고 함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하여 엉뚱한 곳으로 끝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그는 하늘에 계시며 지금 성령으로 각자에게 역사하신다.

(예수의 이름을 한번 부르는 것은 성경을 한번 읽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행동을 다 기록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둘 곳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 만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고

다른 말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강조 되어서는 안된다. 

 

 

이글은 사랑그리고편지 카페 회원이신 handol님의 게시글입니다.

너무 귀한 글이라 전체 메일로 보냅니다.

 

 

출처 : 사랑 그리고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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